미술을 전공하지 않아도 괜찮아
현재 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해오지 않았던 사람처럼 살고 있지만 사실 2018년 12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년 9개월 전 디지털 아트를 만나기 전까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수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회사에 취업하는 대신 수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 '1+0=1'라는 당연해 보이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증명하여 그제야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정답을 도출해 내는 전공 수업을 들으며 수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석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수학으로 박사까지 진학하여 교수가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수학자의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학 공부는 할 수 있어도, 수학 연구는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박사 진학 대신 일반 회사에 취업했다.
난 참 포기가 빠르다
메타인지도 높다
영화 <매기스 플랜>에는 수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남녀가 나온다. 비록 나는 수학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지만, 내 주변에는 이공계 필드에서 '수학자'로 살아가는 지인들이 많다. 영화 속 수학에 대한 둘의 짧은 대화가 어떤 의미인지 수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어렴풋하면서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학창 시절에 수학을 잘하던 동창생 남자가 수학자의 길이 아닌 피클 제조업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여자는 왜 수학자가 되지 않았는지 묻는다. 남자는 수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고 단지 수학이 "아름다워서" 좋아했던 것뿐이라고 답하며 수학자로 살아가는 그 좌절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고 말한다. 남자가 말하는 그 좌절감은 수학자란 전체를 볼 수 없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어떤 것을 평생 동안 진리의 조각만 찾아다니는 애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의 짧은 대화에 오랫동안 마음이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수학 공부는 할 수 있어도 수학 연구는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일반 회사원의 길을 선택했을 때 수학자의 삶에 대해 어렴풋이 느껴지던 고뇌가 <매기스 플랜> 속 피클 제조업자가 말하던 그것이 아니었을까. 전체가 무엇일지 알 수 없는 문제들 속에서 진리를 파고들어 그 안에서 연구의 재미와 보람을 찾는 것이 엄청난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며 기나 긴 시간을 인내해야 하는 과정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수학자로 살아가는 삶 대신, 보다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다소 쉬워 보이는 직장인의 길을 선택했던 이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석사 과정의 수학은 학부 과정의 것과는 수준 차이가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다. 박사 공부로 5년 이상의 과정을 인내할 자신도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수학은 못했지만, 메타인지가 높았던 학생이라 참 다행이다.
수학 전공자가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된 나의 스토리를 듣고 신기해하며 수학을 전공한 것이 그림을 그리는데 어떤 도움이나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해하며 질문을 한다. 처음 이 질문을 들었을 때 딱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답이 없었다. 수학과 미술.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하나는 좌뇌, 또 하나는 우뇌를 쓰는 어쩌면 정반대의 분야로 보이기도 한다.
수학을 전공한 것이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을 준 것은 특별히 없는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하며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인터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넘겨 버린 그 질문을 다시 생각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는데, 바로 "엉덩이의 힘"이다. 수학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오래 앉아도 끄덕 없이 탄탄해진 엉덩이었다.
하고 싶은 어떤 것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간다. 열정도 재능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오랫동안 붙잡고 앉아 있으면서 나의 엉덩이는 더 탄탄해졌고 이 힘으로 무엇이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고 맨땅에 부딪히며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린다.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를 풀었다고 당장 눈 앞에 나타나는 보상은 없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그린다고 당장 내게 결실을 가져다주는 것은 단 하나도 없지만,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의 기분을 좋게 했다. 나의 기분이 좋아지고 내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모든 것이 허락되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전체가 무엇일지 알 수 없는 문제들 속에서 진리를 파고들어 그 안에서 연구의 재미와 보람을 찾는 것이 수학이듯, 내가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모습도 수학자들의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전체가 무엇일지, 결과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과정 속에서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파고들어 진정한 나를 만나는 과정이 내게는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나는 나를 더 잘 알게 되고 나를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나를 꺼내 보여주는 일
그림으로 말하는 작가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