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핍을 만나다
괜히 뜬금없이 슬퍼 보이는 두 가지가 있다. 오만가지 표정을 보여주는 누군가의 뒷모습과 그만큼의 오만가지 사연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누군가의 신발이 내게는 그랬다. 사람의 뒷모습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을 지나온 세월의 수많은 사연들을 실루엣 하나로 보여주는 듯하다. 두 발을 움직이며 하루하루 끌어당기며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누군가의 신발을 보면 존경심과 애잔함으로 눈길이 가곤 한다.
1888년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거주할 당시 고흐는 두 개의 의자를 그렸다. 왼쪽 고흐 자신의 의자는 낡고 초라해 보이며, 반면 오른쪽 고갱을 위한 의자는 화려하고 따뜻해 보인다. 고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자신의 신발과 의자는 유난히도 낡아 있었고 힘들고 고독했던 고흐의 인생 자체를 보는 듯했다. 자신의 신발과 의자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을 당시 고흐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뒷모습과 신발만으로 누군가의 인생과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으며 다 알고 있다는 듯 이해하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낡아버린 신발과 누군가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 슬프다고 말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힘들다고 말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슬픔과 고통의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살아온 인생 또한 슬픔이 있었고 고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직접 겪어 보지 않은 것을 위로하거나 아는 체하며 공감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고흐를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위로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된 존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누군가를 향한 위로는 나를 살게 했다. 고흐를 위로하겠다며 수십 점의 오마쥬 작업을 했지만 사실은 나를 위로하고 있었음을 깨달는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 행복해지는 이유이며, 그림을 그리면 자유롭다 느껴지는 이유가 된다.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마음껏 캔버스에 그리면서 대리만족 이상의 희열을 느낀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 단번에 내가 그림에 담은 감정을 세세하고 깊게 느끼는 관람객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고흐가 남긴 그림을 보며 그림 너머에 있는 고흐의 마음을 위로하듯, 내 그림 앞에서 그림을 그렸던 당시 내 심정을 헤아리며 눈물짓던 누군가를 잊을 수가 없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미묘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내 마음을 그대로 느껴주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를 계속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작가로 살게 한다. 그림으로 말하는 작가로 평생을 살고 싶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한다.
만약 현실 세상에서 누군가가 나와의 짧은 만남만으로 나를 다 파악했다는 듯이 말하고 모두 다 안다는 듯이 나를 평가한다면 불쾌하다 했을 터이다. 하지만 그림으로 말하는 작가로 살게 되니 내 그림을 보고 누군가가 다 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평가를 하더라도, 심지어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나는 모든 것이 용서될 뿐만 아니라 감사할 따름이다. 그림을 방패 삼아, 그림을 안식처 삼아 꺼내 놓은 감정 그대로를 누군가 그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느껴준다는 것은 대단히 짜릿하고 벅찬 행복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솔직해서 좋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의 진짜 속 이야기는 지독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 아픈 상처나 힘든 문제는 내 안 깊숙이 묻어 두고 듣기 좋은 이야기만 꺼내 놓는다. 누구와도 나누지 못한 이야기는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상처로 곪고 있는 줄도 모른 체 시간이 흐른다.
"괜찮아"라는 말을 자주 써오며 살았다. 이 단어는 거의 모든 기분과 상황에 다 적용되는 말이다. 정말 괜찮은 상황뿐만 아니라, 안 괜찮은 상황에서도 괜찮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괜찮아"를 외쳤다. 그러면 정말 괜찮은 것 같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기 때문이다. 나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고 있는 문제를 꺼내 놓으려고 해도 나조차도 딱히 무엇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해서 말로 표현할 만한 대상을 찾지 못한 채 그만 두기도 했다.
나조차 나를 알지 못했고 그런 나에게 "괜찮아"를 주입하며 나를 돌보지 않았다. 실체 없는 그 문제의 감정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면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랬기에, 뜬금없고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그 감정을 만날 때마다 늘 낯설었다. 그때마다 나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그림으로 말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언제 어디서나,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내 이야기를 쏟아 내어도 문제없는 든든한 친구이다.
내가 어떤 감정인지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는 시간 동안 나는 충분히 행복했으니 괜찮다. 반대로 에둘러 담은 나의 모든 감정을 누군가가 다 알아차려 버려도 이제는 부담스럽지 않고 감사하다.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은 것이 바로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통해 나를 알게 되고 나를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위로를 받고 치유가 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만으로 내적 치유가 시작된다. 내 그림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 가슴이 벅차오른다. 즉각적으로 어떠한 보상이 나타나지 않는 그림을 꾸준하게 그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람들은 내 그림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하지만, 가장 크게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를 위로하고 싶다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가장 큰 위로를 받은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인생을 알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다고 시작했던 오마쥬 역시 지나고 보니 가장 큰 위로를 받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