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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인 Oct 22. 2023

마흔 살의 일출

새해 첫 해는 매일 뜨는 같은 해가 아닙니다.

“언니 한라산 백록담 가봤어요?” 


같은 동네에 사는 서울에서 온 친한 동생이 물었다. “한라산 백록담에 3번 올라가 봤어. 두 번은 나랑 딸 둘이랑 여자 셋이 올라갔고, 한 번은 1월 1일에 일출 산행에 도전했고…” “우와 언니 대단하다.”


제주도 어디 가나 우뚝 솟아있는 한라산을 볼 때마다 한 번쯤은 가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주변에는 한라산 산행을 위해서만 제주도를 찾는 친구들, 지인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주도에 살면서 한라산에 가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실 한라산에 가는 일은 아주 쉬울 수도 정말 어려울 수도 있다. 아주 쉬운 방법은 한라산에 백록담으로 가는 코스가 아니라 다른 코스로 가는 것인데, 왕복 1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어승생악, 불국사 코스도 있고, 그보다 조금 더 어려운 코스로 왕복 4시간 이상 걸리는 어리목, 영실 코스가 있다.


한라산에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우리 가족도 짧은 코스부터 시작했다. 어승생악 코스는 짧은 코스지만 경사가 가팔라서 오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제주도 여행에서 시간이 부족하지만, 한라산을 꼭 한 번쯤은 가보고 싶거나, 산을 오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코스로 추천한다. 어승생악에 성공했다면 다음에는 영실, 어리목을 도전할 차례이다. 영실은 한라산의 오백 장군으로 불리는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코스이고, 어리목은 다른 방향에서 한라산에 올라가는 코스로 4시간 이상 소요되는 쉽지 않은 코스이다. 위에 네 코스도 정상에서 한라산 고유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코스로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다.


정말 어려운 코스는 백록담을 오르는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이다. 무분별한 등반으로 자연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 두 코스를 오르기 위해서는 사전에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계절에는 등반 예약에 성공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백록담에 올라갔던 이유는 한라산의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고 싶다는 마음과 백록담의 천지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혼자라도 갔을 텐데 당시 8살, 10살인 딸들도 백록담에 올라가고 싶다고 얘기해서, 남편이 서울에 간 추석연휴에 여자 셋이 마음을 모아 등반을 결심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지만, 엄마로서 딸들을 잘 이끌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나의 다리를 움직이게 해 줬고, 아이들은 “우와 어린애가 잘 올라가네. 얼마 안 남았어, 힘내”라는 어른들의 응원에 무겁던 발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다. 그렇게 백록담 첫 등반을 마치고 다시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 두 번 다시 하지 말아야지 했지만, 등산의 괴로움이 잊힐 1년이 지나서, 정확히 여자 셋이 다시 한라산 등반을 계획했다. 1년 사이 아이들은 성장해, 등산이 가장 힘든 사람은 첫째 딸에서 나로 변해 있었고, 아이들의 꽁무니를 보며 백록담에 올라가는 기분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2023년 1월 1일 일출을 보기 위해, 백록담에 세 번째로 향했다. 맨날 뜨는 해인데 왜 꼭 1월 1일에 보는 해가 특별하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 해의 마지막 해를 보는 일과 다음 해의 첫해를 보는 일은 괜히 신성하게 느껴진다. 그래야 새해를 알차게 보낼 수 있겠다 싶었다. 한라산 등반은 원래 야간 산행이 허락되지 않는데, 일출을 볼 수 있는 1월 1일 새벽에만 야간산행을 허락했다. 많은 인원이 올라갔을 때 위험할 수 있어서 입장객도 통제하고 있는데, 한라산 새벽 등반을 신청하는 홈페이지는 접속 대기만 수백 명일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운 좋게도 4 식구가 다 등반할 수 있게 4자리 예약에 성공했지만, 12월 31일에 첫째 딸은 발목이 다치고, 둘째 딸은 고열 감기에 걸려서 아이들은 집에 두고 남편과 나만 등반을 결정했다. 


새벽 등반은 생각보다 많은 장비가 필요하다. 눈길을 올라가야 하기에 아이젠은 필수고, 어두운 밤길을 밝혀줄 헤드랜턴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눈이 바지에 젖지 않게 막아주는 스패츠, 스틱, 핫팩, 찬물을 부으며 따뜻한 음식으로 변하는 전투식량도 챙겼다. 새벽 4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집을 나서는 순간 비장함이 감돌았다. 한라산 관암산 코스 출발점에 차를 주차하고 준비해 온 장비들을 모두 장착하고 산을 향해 발길을 내딛는 순간 드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내가 왜 또 한라산에 올라간다고 이러고 있지. 집에 가고 싶다!” 새벽의 산은 두려울 만큼 어두웠다. 집에서는 그토록 밝았던 헤드랜턴의 불빛도 숲에서는 초라했다. 그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며 사박사박 눈길을 밟았다. 내가 눈을 밟는 시선 아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는 왜 올라가야 하는지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발걸음을 옮기자고만 다짐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자 중간 지점인 삼각산 대피소가 나왔다. 집에서 충분히 일찍 출발한 것 같았지만, 막상 해가 뜨는 시간보다 늦게 백록담에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조급해졌다. 이렇게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일출을 보지 못하고 간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줄지어 눈길을 밟으며 올라갔다. 급하게 올라갔더니 다행스럽게도 뜨는 해보다 먼저 백록담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해가 뜨기 전까지 몇 십 분이 남은 상황에서 백록담 정상에 서서 좋은 자리를 잡고 기다려야 했는데, 땀이 식은 상태에서 찬 바람이 부니 말 그대로 너무 추웠다. 군대에 갔다 왔을 리가 없는 나에게 이렇게 극심한 추위는 난생처음이었다. 몇 분 후면 드디어 백록담의 일출을 볼 수 있을 텐데, 일출이고 뭐고 이 추위에서 벗어나 따뜻한 곳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다. 추위만이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다. 새벽 내 빈속에 등산했더니 이제 허기짐이 몰려왔다. 춥고 배고픈 것처럼 고달픈 것이 없다던데 딱 그러한 상황이었다.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면서 눈이 빠지게 뜨는 해를 기다렸더니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2023년 1월 1일 첫해가 떠올랐다. 구름이 약간 깔려있어 사진에서 봐왔던 일출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백록담에서 보는 일출은 장관이었다. 드넓은 우주에서 바라보는 화성의 모습이 이럴까? 수평으로 넓게 깔린 구름 위로 주황, 붉은빛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도 좋았지만, 속으로는 이제 따뜻한 밑으로 내려가서 맛있는 아침을 실컷 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더 행복했다. 해가 반가운 건지,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던 건지 어느 마음이 컸다고 얘기하기 어렵다.


제주도에 간다면 한 번쯤은 한라산에 가보면 좋겠다. 사전에 예약해야 하고, 등산이 힘든 사람들이라면 백록담이 아니라 비교적 짧은 코스인 어승생악이나 어리목에 가도 좋다. 화산섬 제주를 온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한라산에 언젠가 다시 가보고 싶다. 하지만 한라산 입구에 가면 속으로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힘든 걸 왜 또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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