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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을 찾다가 마주한 독서의 이유

by 책읽는 리나

예전에 TV 프로그램에서 음료수 캔을 30년 가까이 모아온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한정판 캔, 외국에서 공수해온 캔, 시리즈별로 맞춰 세워둔 캔이 장식장에 꽉 들어차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나만의 컬렉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정리정돈을 잘하지 못해, 모은다기보다 쌓인 것들이 많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테디셀러의 초판본을 모으면 어떨까?’


책의 초판본을 모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이 책이 오랫동안 사랑받을 책이라는 걸 알아보는 눈(대부분의 책은 시간이 흐르면 절판이 되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출간되는 책의 초판본을 가져야 의미가 있다) , 또 하나는 그 책의 초판본을 구매하거나 구하는 타이밍과 순발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책이 출간되면 늘 초판을 사셨다. 책의 본문보다도 제일 먼저 판권면을 확인하셨다. 이런 습관이 나에게도 남아있다. 책을 사면 제일 먼저 뒷장을 (요즘은 앞부분에 적혀있는 경우도 있다) 열어 몇 쇄인지를 확인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초판본이 있을까 찾아보다가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꺼냈다. 1996년 초판이었지만 내 책은 아쉽게도 1판 2쇄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더 오래된 책이라 혹시나 했지만 9판이었다. 1989년 6월에 출간되었는데 가지고 있는 책은 1992년 7월 9판이다. (이 때는 '쇄'를 '판'으로 적었나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20240223_112646.jpg 1996년 1판 2쇄


20240223_111857.jpg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20240223_111912.jpg 1992년 9판


1판 1쇄가 있어야 컬렉션을 시작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이 아이디어는 포기해야겠다.


“애들아, 초판본을 모아보면 어떨까?”

아이들에게 내 생각을 들려주었다.

“엄마, 그런 건 100권은 모아야 콜렉션이죠. 금방 포기하실걸요?”


역시 나보다 판단이 빠르다. 아이 말이 틀린 게 아니다. 책을 구하는 일보다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는 일이 더 어렵다.


요즘은 초판본을 모으는 대신, 책을 펼칠 때마다 언제 어디서 샀는지, 그때 어떤 마음으로 읽었는지를 먼저 떠올린다. 책마다 그 시절의 내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면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그때의 공기와 감정이 되살아난다. 초판의 가치는 없지만 그 책을 읽던 순간의 기억은 남아있다. 결국 내가 찾고 있었던 건 책의 첫 인쇄본이 아니라, 그 책을 읽던 나의 첫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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