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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원고, 그 문장을 이어보다

by 책읽는 리나

아버지는 ‘지고이네르바이젠’이라는 곡을 특히 좋아하셨다. ‘집시의 선율’이라는 뜻의 이 음악은 언제 들어도 감정의 폭이 넓었다. 도입부는 늘 마음을 흔들었다. 아버지가 왜 이 곡을 그렇게 좋아하셨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자유롭고 격정적인 리듬에 끌렸던 것 같다. 규칙적인 일상과 틀 속의 삶을 살았지만, 마음 한켠에는 늘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으셨던 분이었다.


퇴임 후, 아버지는 오랜 꿈이었던 글쓰기를 시작하겠다고 하셨다. “이제는 쓰고 싶었던 내용을 글로 옮겨야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서재 한쪽에 클리어 파일을 쌓아두고, 신문에서 미담 기사를 오려 끼워 넣으셨다. 세상에는 선한 이야기가 많다고, 그런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실제로 주제별로 자료를 분류하고, 친구들과 모임을 만들어 각자 읽은 책을 발표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은 읽는 일과는 달랐고, 진도는 좀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평생의 꿈이었던 글쓰기는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재를 정리하다가 그때의 원고를 발견했다. ‘착한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몇 장뿐인 출력물 속에는 수정의 흔적이 빽빽했다. 생전에 “이걸 누가 이어서 써줬으면 좋겠다”고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오래 마음에 걸려있었다. 그때는 차마 "제가 하겠어요."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 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버지는 쓰지 못한 문장을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읽고 생각하는 일’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몇 해 전, 독서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우연히 지고이네르바이젠이 흘러나왔다. 이상하게 마음이 크게 움직여 차를 멈추고 한참을 울었다. 집에 돌아와 음악을 다시 들으며 문득 아이들은 나중에 나의 무엇을 기억할까 궁금해졌다. 아이들이 함께 보낸 일상의 기억들을 오래 간직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의 원고를 다시 꺼내 읽었다. 책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과 독서에 대한 소신 그리고 그로부터 내가 받은 영향을 이어 써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라도 이렇게 글로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책을 사랑하셨던 그 마음, 선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 하셨던 열망을 뒤늦게라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음에 감사하다. 글을 쓰는 일은 여전히 어렵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믿어본다. 쓰다 보면 결국 쓰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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