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조각하며
사람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는 의식이 있다. 시험 내용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머리를 감지 않을 수도 있고 합격의 문턱에서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미역국을 피할 수도 있으며 행운의 양말이나 속옷을 챙겨 입을 수도 있다. 각자 자신의 인생에서 괜찮은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찰나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나 역시 기대하던 순간이 다가오면 잊지 않고 치르는 의식이 있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손에 비누 거품을 낸다.
2. 깍지를 끼고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지른다.
3. 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든 뒤 손끝을 반대편 손바닥에 문지른다.
4. 손바닥으로 손등을 쓸어내리며 거품을 골고루 묻혀준다.
5. 미지근한 물로 헹군 후 건조한 수건으로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낸다.
6. 밝은 장소에 자리를 잡는다.
7. 어두우면 스탠드를 켜도 괜찮고 햇볕이 잘 드는 창가 근처도 좋다.
8. 자세는 흔들리지 않게 편안한 모습을 취한다.
9. 준비 끝.
10.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손톱깎이로 손톱을 깎으면 된다.
손톱깎이의 묵직한 턱 날을 말랑말랑해진 손끝으로 바투 가지고 가 불투명한 흰 손톱이 손톱깎이에 정확하게 들어갔는지 확인한다. 멀쩡한 살이 딸려 들어간다면 원하지 않았던 피를 볼 수 있으니 신중하게 임해야 한다. 단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낼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이 작업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했던 일이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적당히 힘을 주어 손톱깎이의 손잡이를 누른다. 날이 부딪히는 맞물림 속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비죽 튀어나온 손톱이 잘려 나간다.
엄지손톱부터 새끼손톱까지 이어가며 한 손을 마무리하고 말끔해진 손으로 손톱깎이를 이어받아 같은 방법으로 다른 쪽 손톱을 깎는다.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일이지만 손잡이를 내릴 때마다 철과 철 사이를 통과하는 또각- 소리가 마음에 든다. 울림은 마음속에서 작게 메아리치며 묵은 상념들을 잘린 손톱과 함께 털어내라고 소리치고 말끔하게 다듬어진 손으로 무엇이든 해보라고 용기를 주는 듯싶다.
손톱깎이가 없던 시절에는 길어진 손톱을 돌로 갈거나 커다란 가위로 잘랐다고 한다. 밤에 손톱을 깎으면 쥐가 떨어진 손톱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주인처럼 모습이 변해 주인 행세를 한다는 옛말이 있다. 불도 제대로 켜지 못하는 늦은 밤 거센 가위로 손톱을 깎는 가족의 안부가 걱정되어 만들어낸 설화가 아닐까? 섬세하지 못한 가위로 손톱이 아니라 멀쩡한 손가락을 잘라버릴 수 있으니 미리 겁을 줘 예방하는 차원에서.
손톱깎이의 소재인 ‘철’을 소리 내 발음하면 강하고 단단한 느낌이 든다. 종성에 있는 리을처럼 엄격하게 각진 태도로 무엇이든 뚫고 나아갈 힘을 단어 자체가 뿜어내고 있다. 자칫 잘못 사용하면 억세고 투박해서 휘어지지 않고 모든 걸 파괴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의 손톱깎이를 매만져본다. 오래 쥐고 있어서인지 온통 철로 이루어진 손톱깎이에서 내 체온이 느껴져 따뜻하다.
불과 며칠 전에는 잘 사용하던 손톱깎이가 사라졌었다. 그동안 손톱은 점점 자라나 하얀 부분이 꽤 길어졌다. 다른 손톱깎이를 사용해 잘라도 충분했지만 내가 사용했던 익숙한 그것을 기어코 찾아내 쓰고 싶었다. 마음과 달리 작고 반짝이는 철은 방 어딘가에 꽁꽁 숨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다른 가족들이 사용하던 손톱깎이를 이용해야 했다. 바다 건너온 직사각형 모양의 손톱깎이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으나 평소와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손잡이에 힘을 주면 한 번에 잘리지 않고 누르는 방향대로 손톱이 휘어지면서 깎였다.
이후 투박하게 잘렸던 손톱이 둥글게 마모되면서 부드러운 모습을 갖추며 다시 자라났다. 손톱을 다듬을 때가 다가왔다. 깔끔하게 잘리지 않고 늘어지듯 잘리는 게 싫어서 미루고 있었는데 사용하던 손톱깎이를 찾았다. 분명 살펴봤다고 생각한 자리에 누가 가져다 놓은 듯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톱깎이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오래 사용해서 자주 닿는 부분은 손자국을 따라 칠이 벗겨져 원래 철이 가지고 있는 짙은 회색이 드러나 있었다. 요령껏 깎을 수 있도록 턱 날이 옆으로 휘어졌거나 뾰족한 각도를 가진 손톱깎이도 있던데 눈앞에 있는 건 일자로 된 평범한 모양이다. 손잡이가 부드럽게 돌아가는지 만져보니 세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관절은 이리저리 유연하게 돌아갔다.
하나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허공을 떠도는 공기에 단풍 냄새가 진하게 배었다. 자라나는 손톱을 막을 수 없듯이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뺨에 닿는 온도에 마음이 울렁거려 괜히 지난 시간을 뒤적거렸다. 나는 어디로 흐르는 걸까. 시간만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아 야속하기만 하다가도 괜히 알 수 없는 앞날에 기대도 해봤다. 하루하루가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난 지금 어디쯤 있는 걸까. 내가 이 시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만큼 시간도 나를 생각해주고 있기는 한 걸까. 나만 하는 짝사랑이 아닐까.
익숙한 그것으로 손끝 너머 튀어나온 불필요한 손톱을 잘랐다. 쌓인 잡념과 낡은 과거와 걱정을 아주 잘게 조각하는 기분이다. 의지할 곳이 없어서 마음이 힘들 때면 손톱을 깎으며 스스로 응원하는 말을 되내어본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