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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매 Feb 21. 2024

누구나 깍두기가 된다


저는 깍두기였습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온전히 한몫을 못하지만, 껴주는 그 깍두기요.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처음 회사 생활을 인턴으로 시작했습니다.


인턴은 보통 2가지 형태가 존재합니다.

체험형 인턴과 채용형 인턴.

저는 2가지 형태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차이점은 '정규직 전환'의 가능성을 열어두는지 여부입니다.

공통점은 둘 다 '깍두기'와 같은 존재라는 거죠.


정규직 전환의 가능성이 없는 체험형 인턴 시절에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일도 조금씩 배우지만, 언젠간 떠날 사람이라는 걸 모두가 알아요.

그래서 중요도나 난도가 있는 일은 거의 배우지 못합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는 오히려 이 시절에는 재미있게 회사를 다녔습니다.

어차피 정규직 될 거 아니라 씁쓸할지라도 스트레스는 덜 했죠.


정규직 전환을 전제로 했던 채용형 인턴 시절에는 하루하루가 드라마 '미생'이었습니다.

일은 일대로 배우는데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없어요.

중간중간 업무 외에도 시험이나 면접으로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함께 입사해서 친구처럼 친해진 동기들과 경쟁을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점도 많습니다.

처음 접해보는 회사의 시스템을 보고 배우기도 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값진 교훈을 얻기도 하고,

몰라서 헤매고 있으면 옆에 와서 설명하고 도와주는 멋진 선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깍두기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말랑말랑해서,

남들이 살짝 던지는 모래 같은 농담도 주먹만 한 돌덩이가 날아오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령, 정규직 전환 결과를 한 달 앞두고 있을 때

업무 R&R을 짜다가 제게 맡기려던 프로젝트를

'한 달 후에 네가 없을지 모르니 우선 보류하자'는 말을 듣는 경우죠.

농담 반 진담 반이었겠지만 저는 그날 그 선배가 배탈이 나기를 바랐습니다!


입사할 때는 '문제가 없으면 전부 정규직 전환이 된다'라고 설명하던 팀장이

다른 직원의 입을 통해 '어쩌면 절반 정도는 채용이 안 될 수도 있다네' 하는 말을 건너 듣게 한다던지요.

스스로를 깍두기로 여기는 시기에 그 말랑말랑한 마음은 다치기 쉽습니다.


사실 저는 눈물이 참 없는 편인데요.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 합격 발표를 받은 날,

진상이지만 술을 마시고 엉엉 울었습니다.

함께 고생한 동기 절반이 계약 종료되었는데 원망할 곳이 없었거든요.


어쨌든 그렇게 전환이 됐고, 더 이상 깍두기로 살 일은 없는 줄 알았어요.

근데 그 순간은 또 옵니다.

정규직이 됐을지라도 옆 동료가 승승장구할 때 나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어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 추억을 나누며 웃다가도 문득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어요.


누구나 깍두기가 됩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은 깍두기의 마음이 말랑말랑하다는 걸 모를 때가 많아요.


그러니 깍두기에게는 두 배로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여기 누군가는 말랑말랑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해 뒀으면 좋겠어요.

상사보다는 인턴에게 더 따뜻하게 대하고,

취직한 친구들 사이에 아직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의 생일을 더 챙기고요.


그런 말랑말랑함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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