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명료하되 긴 여운을 남기는 시원한 동치미 막국수
음식을 먹으러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작은 여행을 떠난다. 점심 먹으러 가봐야 얼마나 가겠냐만은 멀리 가고 오래가는 것이 여행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나서는 순간 메뉴를 선택하고 그 메뉴에 얽힌 이야기와 추억을 떠올리는 순간부터 작은 여행은 시작된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그 누군가와 음식을 먹었던 추억이 가장 가깝다. 가까운 사람과 깊은 추억을 남기는 여행이야말로 일상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값진 시간이다.
성천 막국수를 알게 된 건 9년 전 한양대에서 일하던 후배와 업무상 알게 된 뒤부터다. 괜찮은 음식점을 소개한다고 했다. 잔뜩 기대한 내 눈에 들어온 가게는 주차장도 없는 허름한 길가 작은 가게였다. 음식점을 외형적인 간판과 가게 규모, 위치와 주차장 등으로 판단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을 담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은 어디에나 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나면 바로 주변의 보물들을 건질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나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막국수와 제육은 나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당연히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로부터 반년 뒤 다시 그 집을 가게 되었다. 왠지 물막국수의 맛이 달리 느껴졌다. 그리고 만들어서 비벼먹는 무김치도 메밀국수와 곁들이니 한결 잘 어울렸다. 물론 비빔막국수도 달고 고소한 맛이 느껴졌었다. 그렇게 몇 번을 다니면서 조금씩 조금씩 깊은 세계를 느끼게 되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나의 개별적 영역에 속하므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오랜만에 찾아간 가게는 원래 있던 곳에서 이사를 한지 한 3년 정도 되었다고 하신다. 먼저 소금에 절인 얇은 무 더미가 큰 그릇에 담겨 나왔다. 입맛에 따라 겨자, 식초와 함께 이 집만의 독특한 양념을 섞어서 비빈다. 그리고 제육 한 접시가 등장했다.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정태춘의 떠나가는 배) 가기 전에 먹는 음식처럼 차림상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제육 한 점에 양념에 비빈 무 한 조각 얹어 입안에 넣는다. 잘 절인 갈치젓의 감칠맛과 향긋한 비린내 같은 맛이 아스라이 밀려온다. 잘 삶은 돼지고기의 어렴풋한 잡내를 무 무침이 감싸 안아 소멸시켜 버린다.
같이 동석한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물과 비빔 중 한쪽은 사이드 메뉴가 된다. 오늘의 사이드 메뉴는 비빔막국수다. 비빔막국수 한 젓가락에 역시 무와 제육을 올려 한 입에 넣는다. 메밀 맛과 비빔 양념의 고소한 맛, 무 무침의 다양한 맛, 부드러운 제육이 어우러지면서 완벽한 하모니를 입안에서 연출한다. 이 가게가 만들어온 맛의 기둥은 단단하게 느껴진다. 음식 만드신 설계자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나름대로 맛을 만들어먹고 있다.
물막국수는 이 가게의 원류임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느끼게 해 준다. 그릇을 들고 국물을 한 모금 먹는 의식 속에서 나는 숙성된 시간이 저며있는 간간한 동치미 국물의 맛을 본다. 약간은 거칠고 강렬한 맛으로 입안을 자극한다. 메밀면은 포만감을 느낄 여유를 주지 않고 천천히 한 젓가락씩 입안으로 차례차례 들어와 비벼지고 점점이 끊어지면서 목 너머로 사라진다. 이 단순한 과정 속에서 소박한 즐거움을 느낀다. 한 끼니 여행의 끝은 깨끗이 비워낸 빈그릇. 그릇이 빈만큼 내 속은 채워지고 채운 속을 비우기 위해 나는 다시 일상으로 귀환 준비를 한다.
무 무침에 들어가는 양념장의 맛이 궁금했다. 뜻밖에도 오직 소금으로만 양념장을 만드셨다고 한다. 내가 느낀 갈치젓갈의 감칠맛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박범신의 소설 <소금>은 소금과 노동에 관한 어느 가장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지만, 나는 염전에서 서서히 익어가는소금이 밥상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식재료들과 결합하는 장면들을 연상했었다. 그러고 보니 소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식재료중의 하나다.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엄청난 자연의 풍화가 알알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소금은 콩국수에 넣는 것처럼 급하게 맛을 내기도 하지만, 김치나 젓갈을 담을 때처럼 다른 음식과 익는 시간이 필요한 식재료다. 소금이라는 단순한 단어와 아득한 시간의 결합이 빚어내는 작용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문을 나선다. 단순함 안에 상상하는 것 이상의 커다란 맛의 세계가 들어있다. 그 여운은 입안에서 머물다가 곧 사라졌지만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