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는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만일 당신의 경험이 꽂힌 책장을 분류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이름을 붙일까? 우선 공통의 경험들을 묶어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좋았던 경험과 좋지 않았던 경험, 더 구체적으로는 감동적인 경험과 즐거웠던 경험, 우울했던 경험과 무서웠던 경험. 대부분의 분류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단맛을 느낀 경험과 신맛을 느낀 경험, 혹은 꽃향기 경험과 화장실 냄새 경험과 같은 파티션을 사용할 사람은 없다. 경험에 이름을 붙일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요소는 바로 정서이기 때문이다.
이전 글의 마지막에 언급한 것과 같이, 정서는 가장 훌륭한 인출 단서가 되어준다. 정서가 섞여있는 경험은 다른 일반적인 경험에 비해 떠올리기가 훨씬 쉽다. 그것은 그 정서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마찬가지다. 경험이 인상적이라는 것은, 정서를 많이 자극했다는 뜻이다. 어떤 경험이 당신을 감동시키거나, 놀라게 하거나, 즐겁게 하거나, 충격을 주거나, 혐오스럽게 하거나, 화나게 한다면 당신은 그 경험을 오래 기억하게 된다. 당시의 경험에서 가장 강력한 맥락은 정서이기 때문이다.
빈곤 포르노 역시 불쾌감을 무기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빈곤 포르노란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의 불행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며 동정심을 유발하고, 이를 통해 모금이나 후원을 유도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의 후원 모집 TV광고에서 이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효과가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제공하는 경험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부정적인 정서 유발도 얼마든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부정적인 정서는 일시적인 매출 상승, 정기후원 등록 등 당장의 행동을 유발하는 트리거로 작용하기에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불편함을 유발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당신이 제공하는 경험이 참여자에게 불쾌감을 유발한다면 당장 어떤 행동을 유발할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깊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판단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지심리학의 의사결정 모델에는 다양한 이론과 주장이 존재한다.(참고할만한 글: 의사결정에 대한 두 가지 시각, 기대효용이론과 전망이론.) 그러나 현대 이론의 대부분은 인간의 판단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유형의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 습관에 의해서, 직관에 의해서, 다수에 의해서. 정서는 그중에서도 아주 강력한 이유로 작용할 수 있다.
의사결정은 인지적인 자원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다. 생각보다 에너지를 많이 잡아먹는다. 그러나 긍정적인 정서는 의사결정을 위한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공포 마케팅과 빈곤 포르노에서 부정적인 정서가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게 한 것을 떠올려보자. 부정적인 정서는 인지적인 에너지를 많이 소모시키고, 의사결정까지의 시간을 단축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정서가 신중한 결정만을 유도한다는 뜻은 아니다. 심사숙고라는 선택지도 선택할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직관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가격이 저렴하고, 스펙이 좋고, 아무리 기능이 많아도 '그냥 이게 더 끌린다'는 긍정적 정서 하나를 이기기는 쉽지 않다. 지인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아주 적절한 사례를 본 적이 있었다.
<맥북을 사고 싶은데, 써보니 어떠냐는 질문이 들어오면 맥북을 사려는 이유를 묻는다.>
M1칩셋이 어쩌구, 가격이 어쩌구, 사운드가 어쩌구 → 깝치지말고 윈도우기반 사라고 한다.
예뻐서 → 당장 사라고 한다. 이 경우라면 사지 말라고 해도 곧 산다.
정서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의사결정의 이유'이기도 하다. 기획자가 인간의 정서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다.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정서를 제공하고, 어떤 선택을 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물론 그 둘 간의 상호작용 역시 고려해야 한다. 기획자가 유도하고자 하는 결정에 따라 상성이 맞는 정서를 찾아내고, 유발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긍정적/부정적 정서로 간단하게 나누었지만, 정서에는 그보다 훨씬 깊고 다양한 차원이 존재한다. 윈도우를 팔아야 하는 기획자와 맥북을 팔아야 하는 기획자는 다른 경험을 설계한다. 당신이 제공하는 경험에서 필요한 정서는 무엇인가?
정서와 의사결정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면 동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참고할만한 글: 귀찮음 덕분에 오늘도 움직인다.) 그러나 과감히 생략하고 한 개의 글로 구성했다. 이 글은 이론서가 아닌 실용서가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기획자라면 인간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심리학 이론을 깊게 공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에 쓰는 글들이 그 간극을 매워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기획자가 심리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이 시리즈가 지루한 이론 파트로 시작한 이유. 그것에 대해 다음 글에서 다루는 것으로, 실무에 필요한 심리학 이론 파트를 마무리하려 한다.
위 글은 책 <당신의 경험을 사겠습니다>의 초고입니다. 책이 출간되면서 일부 내용이 삭제되었습니다.
전체 내용은 책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