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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Sep 27. 2021

한적한, 오후의 그린.

14 Greenery 15-0343

저녁 하늘에 노을이 질 때면, 주변의 모든 색들에 서서히 주황색이 스며든다. 아주 느린 속도로 스며들기 때문에 잠깐 그 시선을 놓치면 모르게 된다. 적당한 속도로 색이 변해간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잠깐 그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을 때였다. 선명한 녹색이 찾아온 순간은 그 정도로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찰나의 시간이 가져온 변화는 한순간에 이를 알아차릴 만큼 상당했다.


나와 A를 제외한 모든 것의 색은 말 그대로 녹색으로 변해있었다. 공터의 짙은 흙색도, 나무의 움푹 들어간 갈색도 그리고 구름의 높은 흰색도 이제는 전부 녹색으로 덮여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밀도에 따라, 그리고 그 깊이에 따라 녹색은 무게감을 달리했다.


모두 똑같은 녹색의 페인트로 칠해버린 그런 느낌이 아니라, 재질이 가진 혹은 사물의 명암에 따라 녹색은 그 차이를 명확히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더 선명하게만 보였다. 그저 그런 녹색이 아니라 이건 확실하게 선명한, 아주 선명한 녹색이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적이 있다.


태양이 지평선의 아래로, 구름의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빛이 지면에 도달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순간을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멀리서 내려오는 주황색의 노을이 점차 나에게  , 나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사물은  깊이는 다르지만 주황색의 빛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던 신호등은 조금  짙은 주황색을,  뒤에 있던 가로수길은 조금은 옅은 주황색 빛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깊이와 서로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노을은 천천히 주변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사이에 있던 나는 과연 어떤 주황색을 가지게 되었을까? 자뭇 궁금했다. 나라는 사람의 깊이와  무게감이 어느 정도는 투영되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물과 같이 표면이 반사한 빛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남겨졌을까?


그러나, 뭐가 되었던 모든 것은 노을에 의해... 주황색이 되었다. 그것만큼은 틀림없다.


시간이 흐른 뒤에, 주황색의 노을은  빛을 서서히 잃어갔다. 아마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아침을 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태양은 언제나 나를 기다려주지는 않으니까. 렇게 시간이 지나며 회색의 어둠이 찾아왔다. 주황색의 노을과 회색의 어둠 사이, 나는 짧게 스쳐 지나가는 보라색을 봤다. 저녁과 밤의 경계를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이 짧지만 강렬한 보라색을 보았다. 이것도 역시 틀림없다.


그리고 경계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힘을 잃어갔다. 그렇게 경계를 지나서, 완벽한 어둠 찾아왔다. 아마도 그건 아주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이와 다르게, 선명한 녹색이 차지한 지금 이곳에는 경계가 없었다. 어느 한순간, 아주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녹색으로 덮어버렸다. 나와 A만을 남겨둔 채, 모든 사물은 선명한 녹색이 되었다.


 세계에서 구분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는 나와 A,   뿐이었다. '환상의 2인조'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걸까... 나는 A 손을 잡고 싶었다. 정확히는 따듯한 살색을 지닌 그녀의 한없이 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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