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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Oct 03. 2021

한적한, 오후의 그린.

15 Greenery 15-0343

 생각을 알았던 걸까?


불현듯 A가 내 손을 잡았다. 한없이 따듯하고, 확실한 무게를 지닌 그 손으로 나를 잡아주었다. 모든 것이 녹색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그녀와 나는 유일하게 구분이 가능한 존재들이었다. 너무나 선명했던 녹색에 비해서 다소 선명하지 않은 색감을 가진 우리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 손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나도 A에게 무언가 적당한 무게감을 지닌 손을 주고 싶었다. 내가 A의 손을 통해 느낀 안정감 혹은 안도감에 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유일한 존재의 하나로서 A에게 무게와 온도를 전달하고 싶었다.


반응이라도 하듯, A도 그 손에 힘을 주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 안에는 땀이 고스란히 새어 나왔다. 내 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손에서 새어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땀을 통해 나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A도 긴장을 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이었다. 나와 똑같았다, 다르지 않았다. 그녀도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건 나와 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 환상의 2인조가 되는 것으로.


말을 하지 않고도, 때로는 손에서 베어 나온 땀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를 연결하여 그 감정을 공유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건 충분하다.


어느 정도 변해버린 색에 적응이 되었을 때, A와 나는 어색하게 잡고 있던 두 손을 풀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려놓았다. 한동안 손에 감돌던 적당한 무게와 따듯한 온도는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땀이 묻어있었다.


"언제봐도 신기해, 이렇게 변해버린 색이란 말이야. 그래도 붉은색이 아닌 게 어디야? 그랬다면 호러무비가 되었을 거야" A는 오랜 침묵을 뒤로하고 말을 꺼냈다.


"여기가 전부 빨간색이었다면, 제대로 볼 자신이 없겠는걸." 나는 답했다.


"어디까지나 여기는 너를 투영하는 곳이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 보면 좀 다행이네."

"나를 투영한다고?"

"응, 이 세계는 너를 투영하고 있어. 그래서 이렇게 선명한 녹색으로 변한 거야.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많은 색 중에서."

"이상한데? 나는 녹색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실제로 나는 '녹색'을 그렇게 선호하지는 않았다. 수업 중에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옷, 물건을 살 때에도 녹색을 고르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녹색을 좋아했다면, 분명 나 스스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A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서 나에게 말했다. "뭐, 그건 본인도 모르고 있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선명한 녹색은 너의 한 부분을 투영하고 있는 거야. 그것만큼은 확실해."


'나에게 녹색이 어떤 의미가 있었나'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어떤 연결고리를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여간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기에는 아무런 연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정지된 것처럼 고요했던 공터에 뭔가 불쑥 나왔다고 느껴진 게.


우리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녹색으로 변한 이곳이었지만 예민하게 곤두서있던 시각은 이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뭔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바람을 맞서고 있던 나무의 뒤편에, 거기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그는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우리에게 가닿았다. 우리만 있는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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