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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Oct 04. 2021

한적한, 오후의 그린.

16 Greenery 15-0343

거기에는 분명히 '누군가' 있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존재는 확실히 아니었다. 만약에, 나무 뒤에 숨어서 조용히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고개를 옆으로 내밀고 우리를 보고 있다. 어쩌면 공터의 바닥에 구멍을 뚫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공터의 바닥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구멍도, 통로도 그리고 계단도.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불쑥 튀어나왔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혹은 그녀)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고 있음도 당연하게 다가왔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그도 그저 선명한 녹색을 하고 있었다. 변해버린 세계에 아주 적절하게 녹아들어 있는 그런 존재였다. 녹색이 깊이와 재질에 따라 그 밀도를 달리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그의 존재를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나무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A가 있는 곳보다 멀리 있어서 정확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시선이 있고 고개를 옆으로 하는 것으로 보아 사람으로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얼굴을 제외한 몸은 어떨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나는 그 시선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 시각을 넘어서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가 있다. 차가운, 따듯한, 그윽한 그리고 냉정한 등 거기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다. 그건 그대로, 의미가 있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A를 보는 것인지 또 아니면 우리 모두를 보는 것인지 고정된 그의 시선엔 무언가가 담겨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걸어가서 그의 존재를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 무섭기도 했고 또 막상 용기를 내어 걸어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낯선 공터에서 만난 낯선 존재에 호기심은 큰 힘이 되지 않았다.  


"저기, 나무 뒤에 보여?" A 바라보며 말했다.

"응, 드디어 왔네. 이제야." A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답했다.


'그의 시선' '우리의 시선' 이곳에서 만났다. 분명한 것은  공터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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