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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봉수 Oct 17. 2021

한적한, 오후의 그린.

19 Greenery 15-0343

"날 찾아온 건 자네들인가?" 그는 말을 꺼냈다. 생각보다 짙은 음색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성별을 알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음색'에 불과했다.


"응, 맞아. 당신을 찾아왔어." A는 바로 대답을 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가만히 있던 찰나에 그는 다시 말했다.  


"자네와는 구면이군, 내가 준 물건은 아직 잘 가지고 있나?"

"휘어져버려서 좀 그렇지만 아직 잘 가지고 있어."

"그건 그대로 의미가 있는 걸세, 잘 간직해두게나." 그는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고 나서 나를 보았다.


"자네는 처음인 것 같은데. 나를 본 적이 있나?"

"아, 아니요. 저는 처음입니다." 나도 모르게, 바보스럽게도 존댓말이 먼저 나왔다. 나이도 얼굴도 그리고 성별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존댓말을 했다.


"어떻게 이 세계로 넘어왔지? 자네가 데리고 왔나?"

"정확히는 내가 아니야, 선명한 녹색이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거지." A는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음, 이상한 일이군. 이미 일그러짐은 한 번 생긴 것으로 그 본분을 다했을 것인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그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 생긴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네가 가진 물건은 어떻게 되었지? 다시 직선으로 돌아왔나?" 그는 확인을 하려는 듯이 물어봤다.

"보면 알듯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야. 아주 잘 휘어져있어." A는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여전히 초승달과 같이 휘어져있었다. 그녀에게 생긴 일그러짐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물로써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흠, 일그러짐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로군. 흥미로운 일일세."


홍학은 말 그대로 홍학이다. 연한 붉은색을 가진 새이다. 그렇다고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 전부 표현할 수는 없다. 새가 가진 단 한 가지의 특징일 뿐, 그 전체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거야. 왜 일그러짐은 다시 생긴 거지?" A가 말했다.

"나도 전부를 알 수는 없네. 발생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만 알 뿐일세."

"별게 다 이유가 있네. 아무튼 그 일그러짐은 또 발생했다고. 그건 사실이야."

"뭐, 자네들이 이렇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그건 알 수 있다네. 그나저나 옆에 있는 자네는, 일그러짐을 알았나?"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아니요. 저는 솔직히 몰랐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음표가 어느샌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어요. 그게 이 일그러짐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몰랐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음, 직후에 모든 것이 녹색으로 변하거나 그렇지도 않았다는 말인가. 자네는?

"네, 맞아요. 저에게는 어떠한 순간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그건 나한테 찾아왔어. 그래서 선명한 녹색을 따라 얘를 발견한 거야." A는 중간에 말을 끊고는 이야기를 했다.

"흐음, 두 번째 일그러짐이 발생하고 나서 한 명에게는 음표가 사라지고 한 명에게는 선명한 녹색이 나타나고 그렇다는 말인가?"

"응, 결과적으로는 그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자네 둘에게는 뭔가 연결이 되어있는 것 같네만."라고 말을 하며 그는 다시 한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상식으로는 생겨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처럼 한참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 덜컥 겁이나기도 했다. 어찌 됐든 지금의 이 상황은 그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났다는 의미일 테니까. '지금이라도 괜찮으니 이만 집으로 가겠다고 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할 만큼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 그간 잘은 아니더라도 문제없이 지내오고 있었는데, 괜히 뭔가를 건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지... 오만 걱정이 다 새어 나왔다.


나는 그저 한적한 카페에 앉아 따사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을 뿐인데, 불과 몇 시간 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득히 먼 시간처럼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한적했는지, 얼마나 따사로운 오후였는지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나라는 사람은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머릿속에서 음표가 사라졌으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인데. 그동안 즐겨 듣던 클래식 음악이 그 머릿속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 생긴 건데. 집에 돌아가고 싶다니...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한가.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목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마음을 부여잡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일에,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먹었다. 나는 반드시 이 이상한 일을 해결하겠다고, 사라져 버린 음표와 클래식 음악을 다시 찾아오겠다고. 그런 마음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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