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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Mar 01. 2024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

Spare the rod and spoil the child

아이가 다니고 있는 바이올린 학원에서는 일 년에 두 번 정기 연주회가 열립니다. 바이올린을 이제 막 시작한 아이와 벌써 유려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아이들이 모두 모여서 하는 이 연주회를 준비하느라, 연주회 한 달 전부터는 학원이 늘 복작복작합니다.


처음에는 반짝반짝 작은 별만 연주할 줄 알던 아이는, 이제 약간 난이도가 있는 협주곡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노래를 연주할 수 있는 친구부터 시작해서 가장 처음 배우는 노래인 “반짝반짝 작은 별 Twinkle Twinkle Little Star”로 마무리가 되는 연주 순서에 따라 가장 연주를 잘하는 친구가 무대에 가장 여러 번 서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거의 백여 명 이상의 아이들이 오가다 보니 마지막 리허설날은 그야말로 전쟁이 따로 없죠. 아이들과 악기들, 악기 케이스들에 부모님들까지 더해지면 평소에는 여유롭던 학원의 공간도 발 디딜 틈이 없어지고 늘 야리야리한 우아함을 잃지 않으시는 바이올린 학원의 원장 선생님은 얼마나 에너지를 쏟아부으시는지 이 기간이면 한층 더 종잇장처럼 얇아져 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악기들의 울림, 그리고 이 모든 부산스러움에 한술 더 얹지 않으려는 부모들의 나지막한 목소리 사이를 가르는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꽂혔습니다.

"엄마가 시간 맞춰서 오라고 했지!!!"

연주곡 별로 정해져 고지된 시간이 있었는데, 아마도 아이가 이 시간을 놓쳐 학원에 도착한 듯 했습니다. 이미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화가 잔뜩 나셨더라구요. 순식간에 쏠린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높고 큰 목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겉보기는 분명 한국 사람이었는데, 어딘가 새는 억양과 발음으로 외국인 또는 해외 교포가 아닐까 가늠해 볼 수 있었죠.  


아이에게 큰 소리로 혼을 내는, 그것도 사람들이 꽤 모여있는 장소에서 그러는 모습을 보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는데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주변의 다른 학부모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리다 마주치는 눈빛 속에 '좀.. 그렇죠?'라는 경계어린 메시지가 날아왔습니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훈육에 대한 다른 '기준'이, 그 공간에 있던 나머지 부모들과 달랐고 그로 인해 그녀와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것을 만들어진 느낌이랄까요. 원장 선생님께서 감정이 격해보이는 그 학부모님을 달래려 추가 레슨 시간을 잡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가까스로 상황은 마무리가 되고 목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이 모자를 바라보는 눈길들이 계속 존재했습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혹시 평소에도 늘 저렇게 아이를 대하나?'라는 걱정이 담겨있지요.


그런데 말이죠.

이 날 이 어머니를 보며,

이 어머니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을 보며.


뉴욕으로 이사간지 오래지 않은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쉑쉑 버거 집 앞에 서있던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도 육아도 가정도 놓고 싶지 않은 완벽한 워킹맘이 되고 싶었고, 그럴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집으로 일찍 달려가도, 잠들기 전 2-3시간을 함께 보내면 전부인 날들이 이어졌어요. 아이는 제가 없는 곳에서 잘 크고 있었지만, 아이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영역들은 아이의 성장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도 모르던 시기였습니다. 내 배로 낳은 아이지만, 내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미국으로의 이사를 앞두고 한국 회사일을 정리하고 출국 준비 중이던 있던 시기였습니다.

일하던 시기 제 생활을 들여다보면,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고작 아침에 일어나서 등원까지의 한 시간 남짓, 그리고 퇴근하고 나서 보던 2-3시간. 합치면 아이의 하루 중 제가 알고 있는 시간은 정말 길어야 5시간 언저리였던 듯합니다.


근데, 그 시간이 24시간으로 변하고 나니

원래 이런 아이였나?

싶은 순간들이 쏟아졌습니다.


그간은 함께 보내는 짧은 시간 속에서는 일하는 엄마라 미안하다는 마음이 늘 가득하기도 했기에 아이에게 큰 소리 한번 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늘 아이와의 시간이 좀 더 길어지기를 바랐었죠. 그런데 그토록 함께 하는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고 싶었던 아이인데, 하루종일 붙어 있다 보니 자꾸만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마침 아이는 미운 네살이라는 자기 주장이 강해지는 시기를 좀 더 앞당겨 미운 세살을 본격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남편은 이미 뉴욕에서 곧 올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시기라 한국에서 홀로 24시간 아이를 돌보는 일이 그동안 해보았던 모든 일들 중 가장 어렵다고 혼잣말이 마구 나오고는 했습니다. 낮에는 버럭 화를 내다가 밤에 아이가 잠들고 나면 육아서를 뒤적이며 뭐가 잘못되었는지 고민도 해보고 잠든 아이 손가락을 매만지며 어설픈 엄마라 미안하다고 자책하는 날들을 반복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대하는 제 인내심은 아이가 자라는 동안 별로 자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렇게 스스로가 아직 갈길이 먼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깨닫고 난 뒤 얼마지 않아 뉴욕에서 아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막 자아가 생겨 엄청 말을 안 듣는 아이를 상대하며, 이삿짐을 풀고, 아이 학교를 알아보며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바닥난 에너지에 육아라고 쉬울 리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밖에 햇살이 비치고, 아름답게 강물이 흘러가는 뉴욕이라 해도 갑자기 육아가 쉬워지는 마법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집 앞의 SHAKE SHACK 쉑쉑 매장에서 점심을 때우려고 햄버거를 사서 집에 가기로 했어요.

주문 줄에 서서 심심함에 몸을 배 배 꼬던 아이가, 제가 "엄마 힘들어. 그만해."라고 여러 차례 반복했음에도 계속 놀자며 온 몸으로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그치지 않는 아이를 향해 짜증이 폭발하듯 올라왔습니다.

엄마가 그만하라고 했지!

영어도 아닌 한국말로 버럭 지른 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꽂혔습니다. 당황한 아이 눈이 있었지만 한번 터진 화는 도무지 가라앉을 줄을 몰랐어요. 결국 여기에 한마디 더 얹고 버럭을 한번 더 시연했죠.

엄마는 집에 갈 테니,
넌 아빠랑 같이 사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그리고 서있던 대기 줄에서 나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감정을 뒤로 모습으로 집으로 먼저 걸어와버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먼저 집에 가있던 제 몫까지 햄버거를 사 온 남편이, 집에 들어와 심각한 표정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돌아서 걸어가던 저와 남아 있는 남편을 보는 사람들의 매서운 시선에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마치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보듯 바라보는 시선과,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 당사자인 제 등 뒤로 꽂히던 따가운 느낌은 아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눈길이었다는 것을요. 동시에, 함께 있던 아이는 별일이 없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제야 제가 욱해서 지른 소리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습니다.

그 날의 일화는,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거나 밥을 주지 않고 굶기는 등의 극단적인 사례만 학대라고 인지했던 저나 남편에게, 아이가 잘못했다고 '언성을 좀 높아지는 경우'는 간혹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했지 학대의 범주에 들어가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아이를 키워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언제 엄마가 화를 냈냐는 듯, 와서 안기며 감자튀김을 먹어보라고 하는 아이를 보며 미안한 마음이 앞선 것은 물론이었어요.


그 후, 뉴욕에서 주변의 아이들과 부모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자녀를 잘못된 행동을 훈육하는 부모들의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아이들의 문제 행동에 대한 주변 어른들의 반응등을 특히 열심히 보았던 듯합니다. 사회의 규범이란, 글로 쓰이기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행동규범으로 내려앉아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 과정에서, 좀 다른 풍경들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소리 지르지 않고 나지막이 타이르는 부모들.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설명하는 부모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이에 상응이라도 하듯, 늘 한 둘은 있기 마련인... 악을 쓰며 우는 아이가 없는 놀이터를 보았습니다. 간혹 마트 같은 곳에서 큰 소리로 울며 바닥에 드러눕는 아이를 보더라도,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익숙하게 부모와 아이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타인들이 있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말이에요.


아이들이 하는 정말 작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거의 습관적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자동반사적으로 "Good Job""You did it, my love."를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양육 스트레스가 너무 넘쳐흐르지 않도록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는 아빠들을 보았습니다. 아침이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출근길 아빠들의 행렬과, 출근하지 않는 주말 오전이면 가족을 위해 아침을 만드는 아빠들이 있었죠.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장 좋은 예시들의 모음이지만. 분명 대. 부. 분. 이 이러했어요.)


그렇게, 저와 남편은 각자의 위치에서 미국 육아 환경 내의 새로운 좋은 레퍼런스들을 발견하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늘어갔습니다. 그 결과 저도, 남편도 아이를 대하는 양육의 방식이 변화했습니다. 아이에게는 더 많은 칭찬과 잘못된 행동에 대한 설명을 하려 애쓰고, 아이의 모습을 아이다운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애쓰는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Good 잘했어"라는 한마디로 끝날 수도 있는 칭찬은 "This is awsome!! I really appreciate your effort!! (너무 멋진걸? 애써줘서 너무 고마워)."같이 한결 길어졌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그렇게 열심히 바꾸어가던 양육방식은 코로나 집콕 1년과 온라인 스쿨링에, 남편과 제 일까지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타격을 받기 시작하자 폭발한 스트레스 속에 엉망이 된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어떤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을 좀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던 시기가 있었기에, 가끔(아니 자주요..) 옆길로 새더라도 다시 서로 삐져나간 만큼 당겨주고 서로서로 혼내주며 부모로의 제자리를 찾으려 애쓴 시간들이 지금까지 흘러왔습니다.


물론, 저희가 참고로 한 주변의 가족들의 양육 방식이나 이들이 속한 사회 계층이 전체 미국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인 미국의 아동에 대한 사회적인 보호망 역시 예전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아동을 대하는 사회의 관념이나 시스템이 낙후되어 있던 시기도 있었다는 사실은 1950-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으며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익히 알려진 "Spare the rod and spoil the child.(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와 같은 구문만 보더라도 지금은 아이에게 손찌검이라도 하면 바로 경찰이 출동하는 시대지만 과거에는 분명 체벌을 훈육의 테두리에 두고 본 경우가 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방임]이라는 측면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변화했다는 것을 영화를 보다가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2019년, 제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본 영화 E.T. 에서 저와 남편을 놀라게 한 장면은 특수효과나 스토리가 아니라, 극 중의 엄마가 아이들만 오롯이 남겨둔 채 일하러 나가고 볼일을 보러 집을 비운다는 설정이었습니다. 의도적 설정이 아닌 맞벌이가 일반화 된 미국 중산층 가정의 일반적인 생활방식을 반영한 것이라 더 충격이었어요.

부모가 없는 집에서, 아이들은 외계인과 친구와 말 그대로 난리가 나지요.

영화를 보던 시점인 2019년 당시 뉴욕에서는 초등학교 아이들을 어른의 보호 없이 두고 집을 비울 경우 방임으로 인한 학대로 간주받을 수 있어서,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 경우 베이비시터나 지인에게 아이를 맡겨야 하는 것이 국룰이었습니다. 영화가 개봉한 1982년으로부터 30여 년 이상이 흐르며 분명 여러 번 있었을 각종 사건, 사고들을 통해 이런 '방임'에 대한 처벌이나 법이 보완되고 진화되어 왔을 것입니다.

그 결과를 보여주는 이미지를 하나 볼까요.

아래 그래프의 파란색은 성적 학대, 빨간색은 물리적 학대, 녹색은 아동 방임으로 인한 학대를 각각 의미합니다. 방임으로 인한 학대 케이스는 크게 변화가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물리적 폭행이나 성적 학대에 대한 경우는 그래프의 시작인 1990년과 비교해 보아도 거의 반 이하로 낮아집니다.

U.S. child maltreatment rate trends: 1990–2016. From Finkelhor et al. (2018)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던 2021년. 매우 궁금해졌습니다.  

저희가 한국을 떠나 있던 사이, 아동 학대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크게 불러모은 사건이 발생한 이후였기 때문이죠.


2020년 10월, 일명 '정인이 사건'이라고 통칭되는 계모에 의한 아동 학대 및 사망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SNS에는 분노에 찬 감정들이 넘쳤고, 미디어들 역시 과거부터 이어진 아동 학대에 대한 한국의 사건 발생 건수 및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체계등을 보도하기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수개월 후의 보도자료에서 정인이 사건을 기점으로 '혹시 우리 옆 집 아이도?'라는 생각에 신고 건수가 급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혹시 옆집도?" 전국에 '아동학대 신고' 급증/ 머니투데이 2021.2.18 기사 중

그래서 그 사건의 이전에 한국을 떠났던 우리는 ,

이를 계기로 어떻게 변화했나 궁금했습니다. 아이들의 대하는 어른들의 시선과 말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법의 처벌 수위, 일반적인 부모들의 훈육정서 등이 모두 궁금했던 듯합니다. 모든 것이 빠른 한국은, 모두의 공분을 사는 주요한 사건을 기점으로 법안과 사회문화가 급진적으로 변화해 왔으니까요.

일명 ‘정인이 법(아동학대범죄처벌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과 그에 따른 정부의 ‘아동학대 대응체계 강화방안’이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차례 사망까지 가는 결과를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돼, 연 2회 이상 의심신고 시 즉각 분리는 물론 이를 모니터링 하는 경찰과 지자체 공무원의 권한 강화, 아동학대살해죄 신설 등 전체적으로 국가의 개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법망의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일반적인 부모들이 '다른 가족의 아이'를 보는 시선 역시 변화했다는 것을 느낀 것이 바로 그날, 바이올린 학원에서의 짧은 찰나였습니다.

아이에게 버럭 소리지른뒤 떠나가는 제 모습을 예의 주시하던 뉴욕의 부모들이 있었듯

학원에서 아이를 향한 높아진 부모의 언성에
아이를 함께 지켜보던 한국 학부모들의 눈길.

한국도 '훈육'과 '학대'의 경계를 명민하게 살피며 내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의 아이들도 관찰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는 것이 느껴지던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그 단면으로 그날 그 아이의 부모님이 아이를 학대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사한 상황이 있을 때 제가 아이를 막 낳은 2010년대 초반과 비교해 보면 '음. 저 가족의 일인데.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느낌으로 못 본 체 해주는 것이 주된 분위기였다면, '그래도 혹시...?'라는 마음에 관심을 놓지 않는 시선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 큰 차이로 가는 시작이니까요.



어제는 4년에 한번 돌아온다는 윤달이 있던 2023년 2월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 포털 사이트의 한 뉴스가 제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강남 스쿨존 초등생 사망사고' 40대 음주운전자, 징역 5년 확정


2022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고 있던 평범한 겨울날.

옛 회사 동료의 아이가  '스쿨존'이라 지정된, 안전해야 마땅한 곳에서 대낮의 음주운전자의 손에 아들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지요. 그리고 뉴스로 연이어 보도가 되는 기가막힌 사건에 관련된 여러 사실들을 접하며 이 가족이 앞으로 매 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시기에 겪어야 할 아픔은 상상도 가지 않았습니다. 대낮에 스쿨존에서 음주운전이라니요…

지킬 수 있던 아이를 그렇게 또 하나 떠내보내는 부모를 지척에서 보며, 그 아픔을 바라보며 함께 끓어오른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1년여의 시간이 지나 해당 사건의 그 음주운전자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왔던 거죠.


5년.

참 짧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앞으로 50년보다도 긴 시간을, 이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몇살이겠지, 어떤 모습이겠지를 헤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안전해야 할 장소에서 음주운전으로 아이를 죽인 운전자에게 주어진 참회의 시간은 참 가볍습니다. 이를 보며 또 얼마나 많은 아이를 어떻게 잃어야, 또 하나의 기준이 생기고 또 하나의법이 생기도 또 하나의 규범들이 생겨나 그 다음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방임과 학대,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에 대한 여러가지 면들을 지켜보며 이 시대에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로 살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고 보호하는 사회에서 살아온 기억을 더듬어 한국과 비교해보며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이유는, 제가 낳은 아이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남의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크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음주운전으로 스쿨존에서 아이를 사망하게 한 운전자의 형량이 5년이라는 기사가 실린 신문의 어제 헤드라인은 [‘0.65명’ 출산율 쇼크] 였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이미 태어나 잘 자라고 있었을 수 있는 아이를 잃은 소식과 함께하는 아이러니를 보며 안타까웠습니다. 이미 태어나 곁에 있는 아이들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도 같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10년 후의 우리와, 우리 곁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요.





참고자료.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1021808461693781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35850742_Heed_Neglect_Disrupt_Child_Maltreatment_a_Call_to_Action_for_Researchers

Heed Neglect, Disrupt Child Maltreatment: a Call to Action for Researchers  

April 2020 / International Journal on Child Maltreatment 3(8)


https://www.news1.kr/articles/5336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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