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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Feb 16. 2024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로 자라기를.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2024년의 새해 첫 극장 나들이는 디즈니의 영화 WISH였습니다. 뭔가 새해 소망이나 다짐 같은 것이 느껴지는 제목이라 마침 신년에도 어울리겠다 생각하며 보러 갔는데, 언제나 밝고 희망찬 디즈니 무비에서 의외의 부분에서 제 눈이 개구리 왕눈이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로샤스 왕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일생 가장 원하는 소원을 왕인 마그니피코에게 맡기면 그가 이 소원을 보관하고 있다가 왕의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선정된 사람들에 한해 그 소원을 이루어줍니다. 다만, 사람들은 소원을 맡기는 순간부터 그 소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까지 함께 잊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애달픈 그 마음까지 소원에 담아 함께 보냈던 것이죠.   

그런데, 누구의 소원을 이루어줄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과 이유를 알게 된 뒤 왕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아샤는 친한 친구들과 연계하여 왕에게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로사스 왕국의 시민들을 모아 왕에게 맞서 싸우지요. 


극의 초반, 처음 대면하게 된 왕에게 할아버지의 오랜 소원을 발견하고 이번에 꼭 이루어지도록 해달라 부탁하자 이를 본 왕이 "보통은 이런 부탁을 할 때 다들 적어도 몇 개월은 왕의 보조로 근무하고 난 뒤에야 하던데.. 넌 참 거침이 없구나."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아샤라는 아이가 가진 기본적인 성향이 드러납니다. 이런 아샤는 이후 이어진 이야기 속에서 쭉 일관성 있게 상대가 왕이라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부당하다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고민하는 대신, 해야 할 말이라면 먼저 묻는 아샤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할아버지와 엄마에게도 부당함을 이야기하며 격분하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아샤에게 되려 그런 말 말라며 조용히 지낼 것을 당부한 것은 할아버지였습니다. 이미 익숙해진 시스템에서 본인이 가진 당연한 권리도 포기한 채 살아가는 기성세대를 할아버지를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아이들이 보는 그저 밝고 쾌활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러 갔는데.

시민들의 나라에 대한 태도, 불합리함에 맞서 일어서는 용기... 등, 생각보다 정치적인 요소들이 영화 곳곳에 묻어 있어서 선거철을 겨냥하여 만든 영화인가 싶어 졌을 정도였는데, 이 모든 내러티브 속에서 단연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주인공 소녀 아샤였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나아가는데 거침이 없는 아샤를 보며 저는 묘한 쾌감도 느껴졌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착. 한. 어. 린. 이.

아래로 남동생을 하나 두고 있는 저는, 집안의 맏딸입니다.  

"어릴 적부터 어른스럽고 말을 잘 알아들어서 큰 소리 한번, 혼 한번 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어린이의 전형이었다는 이모삼촌고모들의 간증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정말 그랬었나 봐요. 수월하게 키웠다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늘 이보다 큰 칭찬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알아서 잘하는' 학생으로 살던 시기도 있었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말 잘 듣는 아이는 더 잘 들으며 성장합니다. 그렇게 말대답 한번 한 적 없이 자란 어린이는, 그 후 대학에 입학해서도 교수님 말씀을 착실히 잘 듣고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여 장학금도, 인턴 추천도 무난히 받는 대학생으로 자라납니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가 주어진 대로 열심히 일하며 결혼을 하고 아내이자 며느리가 됩니다. 그렇게 '무난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삶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속에 의문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의견이, 내 생각이 다를 때면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모두를 군소리 없이 그냥 묵묵히 하는데 익숙했던 어린이는, 원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No"를 외쳐야 하는 순간에도 이를 말하는 것이 불편한 어른으로 자랐습니다. 


착한 어린이와 자신의 니즈를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어색한 어른 


'일하는 자아'가 존재하는 회사에서는 달성해야 하는 목표라는 주어진 숙제 해결을 위해서는 소리 내서 싸울 줄 알았지만, 개인적인 생활로 돌아오면 '나'의 의견을 주장하며 싸우는 것이 불편해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 편이 나를 위해서도, 모두를 위해서도 마음이 편안하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제 진짜 마음과 맞지 않는 상황과 선택들을, 그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놓아둔 채 지나간 시간 속에서 진짜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한참 후에야, 싫은 것은 싫다,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싶다 말하는 법을 뒤늦게 건강과 시간이라는 비싼 값을 치르며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게 찾아온 아이는, 저와는 사뭇... 아니 정말 완전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주 어려서부터 자기주장과 요구를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이런 아이를 보며 당황했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요구하지? 원하는 바를 이렇게 끝도 없이 계속 말하지?'


아이가 자라며 그 주장들은 더 명확해져 갔고 이런 아이를 바라보는 제 눈 속의 의아함도 계속 같이 자랐습니다. 여기에 더불어,  얼토당토않은 아이들의 말도 더 열심히 들어주는 어른들이 많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어린이가 환대받는 환경에서 자라면서 아이의 주장과 요구는 한층 더 많아지고 디테일해졌습니다. No를 이야기하는데 거침이 없고, 주장하는 내용들에도 어설프게나마 살이 더 붙기 시작했어요. 타고난 기질의 차이와 환경의 영향 모두를 더한 결과물인 눈앞의 아이를 바라보며 제 안의 두 어린이도 충돌했습니다. 


말을 잘 듣는, 주변사람들의 의견에 Yes, I agree를 말하는 나

vs

타인의 이야기보다는 '나'의 의견을 말하는 No, I don't agree, I think.... 를 말하는 나.


이런 아이와 나를 이해해 보려 책도 읽고, 다른 가정들의 양육방식도 둘러보던 어느 날. 재미있는 자료를 하나 마주했었습니다. 미국의 한 유치원에서  프리스쿨러(4-5세 반)의 아이들의 역할극 내에서의 반응을 한국계와 앵글로 아메리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논문이었는데 , 그 면면이 참 흥미롭습니다.


[Social pretend play in Korean- and Anglo-American preschoolers]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이 논문에서는, 92명의 유치원생 (46명 앵글로 아메리칸+46명 코리안 아메리칸)을 자유로운 놀이 활동 중에 관찰한 결과, 이들의 문화적인 차이는 놀이의 테마 선택과 의사소통에 명확한 차이를 보였다고 해요.

한국계 미국인 아동들의 놀이에는 일상적인 활동 및 가족 역할 테마가 포함되어 있는 반면, 앵글로 아메리칸아이들의 경우 환경적인 위험에 처한다던지 환상적인 테마를 설정하고 노는 것이 관찰되었다. 사용하는 언어적 특성에 있어서는 앵글로 아메리칸에 속하는 아이들의 경우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거나 파트너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지시나 명령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반면 한국계 미국인에 속하는 아이들의 경우 '파트너'의 행동을 묘사하고, 부가 의문문 (You like mushrooms, don't you?), 동의의 표현,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단어의 재사용, 예의 바른 요청의 방식을 좀 더 보여주었다고 해요.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 copilot을 통해서 만들어진 이미지입니다.


가족문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4-5세 언저리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니 아무래도 가정 내에서 아이들이 접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유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적절한 시기니까요.


타고난 기질이 순종적인 저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자기주장이 뚜렷했던 아이는 미국에서 자라는 동안 앵글로색슨 계열의 미국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자라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살아갈 세대가 다른 부모와 자식인데. 타고난 기질도 다르고, 자라면서 노출된 문화적 배경이 완전 달라지니 아이와 저의 간극이 큰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밖에 없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니, 아이 입장에서 더 이해해 보자...싶었지만, 머리로 하는 이해와 달리,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엄마가 '척'하면 '착'하고 따르는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을 보며 매 사 두 배는 설명해야 하는 아이가 버겁게 느껴진 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제 입에서는 여러가지 잔소리들과 함께 이런 말들이 늘어갔어요. 

"엄마가 어련히 알아서 너한테 좋은 것 말하지 않을까?''

"엄마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어른들이 하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일일이 모든 것들의 이유를 다 설명하기에는 매일은 너무 바빴고,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어차피 다 이해하지 못할 것, 일일이 다 설명하는 것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하지 않은 명령에 가까운 지시들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제가 하는 말에 눈 속에는 '아니요.'를 품고 저를 바라보던 아이가 무언가 반박하려던 입을 닫았습니다. 

당연히 반론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입술에 가득 힘을 주고 말하기를 멈추는 아이를 본 그날. 이제 아이가 내 말을 군말 없이 듣는구나 싶었어요. 기뻐하게 될 줄 알았는데,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내 눈앞의 아이는,
아이 그대로가 아니라.
[말 잘 듣는 아이]였던 나의 유년 시절인가. 


그저 말 잘 듣는 어린이로 자란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며 누구보다 후회하는 시간이 길었던 제가, 제 유년시절의 복사판을 만들 듯 아이를 제 마음에 맞게 열심히 조각하고 있었다니요.... 벗어나고 싶은 것들은 꼭 가장 끈질기게 남아 저를 그 자리로 다시 데려가나 생각하니, 참 얄미로운 것이 삶이다 싶었습니다. 


아이가 말하는 '싫어요, 안 할래요'를 듣고 듣고 또 들어주며 타인의 의사와 다른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전하는 연습을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대상이 부모인 우리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토로하며 남편과 함께 우리의 양육 방식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밤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이가 우리가 만든 바운더리를 들이받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정말 열심히 응해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더 늦지 않았기를 바라면서요.




그런데 정말 다행히.

얼마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주말 저녁 식사 후 디저트를 꺼내고 있는 제 곁에서 아이가 유튜브로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며 아이패드로 보아도 될지 물어왔습니다. 안된다는 답을 하는 제게 아이가 질문인지 컴플레인인지 모를 말을 던졌습니다. 


"Mommy. You know that you are way too much strict? "

(의역 : 엄마. 엄마는 엄마가 너무 이거 저거 안된다 말하는 것 많다는 거 알고 있지?)


약간의 비난이 담긴 말이었지만, 이 말속에 담긴 아이의 신호가 느껴졌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그렇게 느껴지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그동안 작은 머릿속에 차곡차곡 넣어둔 [하고 싶지만, 부모인 우리의 가이드 때문에 못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줄줄이 읊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런저런 것들은 자기도 친구들만큼 할 수 있게 해 달라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 가지 것들 중, 가장 오랜 시간 이야기했던 주제는 바로 "유튜브"시청이었습니다. 

3-4학년이 되자, 주변에 유튜브를 보거나 심지어 채널을 오픈하고 개인 일상, 먹방, ASMR 등 다양한 콘텐츠를 올리는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났습니다. 가진 장기가 많은 21세기의 어린이들 중에는 온 세계가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취미와 일상을 업데이트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는데 어른인 저도 깜빡 정신을 놓으면 구경하다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릴 정도로 재치 있게 편집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아이 눈에도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너무 당연하죠. 이런 재미난 플랫폼 속에 직접 출연하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모으고 이를 통해 인기도 얻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아이의 마음도 이해가 갔고요.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 copilot을 통해서 만들어진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이해가 가는 마음과 달리 아이를 보호하는 측면에서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물러설 수 없는 것이 또 부모이기에 안된다는 답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를 어떻게 아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전하는지에 열심히 힘을 실어보기로 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정신과 전문가들이 말하는 소셜 네트워크가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한국이 여러모로 디지털적인 면에 있어서 노출 빈도가 높고 시기가 빠르다는 자료, 그리고 이런 가이드를 주는 부모가 우리뿐만이 아니라 친구 A와 B의 부모님들도 우리와 같은 가이드를 주고 있다는 점, 미국에 있는 어린 시절 단짝 친구 C는 컴퓨터 게임도 전혀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야외 활동을 더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는 이야기, 유튜브나 틱톡을 만든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아이는 13세가 되기 전까지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인터뷰까지. 


그동안 안된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왜 그런지를 이토록 자세히 긴 시간을 쓰며 논의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정말 진심을 담아 한참을 이야기했고, 아이 또한 진심으로 반박에 반박을 더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요. 

아이 눈에 다른 눈빛이 스쳤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의 학교에 행사가 있어 방문했는데 교실 벽에 여러 개의 벤다이어그램이 그려진 종이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선생님께 무엇인지 물으니 아이들이 3-4명씩 팀을 짜서 각각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는 활동을 한 결과라고 설명해 주시더군요.


아이가 친구와 어떤 공통점을 찾았나 궁금해서 살펴보다 보니... 아이가 그린 원형 안에 여러 단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생일, 보라색, 판타지 픽션, 염색한 머리, 연필, 암벽등반... 등 아이가 요즘 빠져있거나 관심 있어하는 여러 가지가 군데군데 적혀있는 가운데, 다른 친구들과 겹치지 않는 영역에 쓰인 한 문장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Does not watch Youtube." (난 유튜브를 보지 않아요.)

분명 불편하거나, 부끄러운... 그러니까, 다른 친구들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약점이라면 쓰지 않았을 것이고 엄마인 제가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쓴 내용도 아닐 텐데. 본인을 드러내는 특성 중 하나로 써두었다니 웃음이 났습니다. 그리고 일종의 선언처럼도 느껴지는 이 한 문장을 보며 끝도 없이 이어지던 그날의 이야기의 끝에 아이도 마음속 동의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살짝 사진으로 남겨보았습니다.


이 한 문장을 얻는데 참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이제 사춘기가 코앞인 아이는 분명 머지않아 또 부모인 우리가 만든 바운더리에 의문을 품고 이를 부시려 애를 쓰겠지요. 하지만, 이제 나와 다른, 아니, 달라야 할 이 아이가 나의 말을 잘 듣기만 하는 아이로 자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말을 잘 따라주기보다는 영화 '위시' 속의 주인공 아샤처럼, 이상하다 생각하는 일에는 아니라 말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옳다 생각하는 방향으로 열심히 달릴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주기를 더 바라기로 말이죠. 그 곁을 지키며 아이의 시행착오를,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다른 길을 가는 아이를 응원하며 말이죠.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 copilot을 통해서 만들어진 이미지입니다.




관련 자료.


1.  Social pretend play in Korean- and Anglo-American preschoolers

https://repository.kihasa.re.kr/bitstream/201002/8689/1/%EB%B3%B4%EA%B1%B4%EB%B3%B5%EC%A7%80%ED%8F%AC%EB%9F%BC.2012.07.N189_15.pdf

https://pubmed.ncbi.nlm.nih.gov/9249965/

Ninety-two preschoolers (46 Anglo- and 46 Korean-American) were observed during free play activities and videotaped in an experimental toy play setting. Cultural differences were examined in the frequency of social pretend play, communicative strategies, and pretend play themes. Anglo-American children engaged in more pretend play during free play activities than Korean-American children. In the experimental setting, there were no cultural differences in the frequency of pretend play; however, there were significant differences in children's communicative strategies and in their play themes. Korean-American children's play included everyday activity and family role themes, whereas Anglo-American children enacted danger in the environment and fantastic themes. Anglo-American children described their own actions, rejected their partners' suggestions, and used directives, whereas Korean-American children described their partners' actions and used tag questions, semantic ties, statements of agreement, and polite requests. The findings suggest that play is a common activity for most children. However, the thematic content and the communicative strategies used to structure and maintain pretend play are influenced by culture.


2. 본 글 속의 모든 이미지들은 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 copilot을 통해서 만들어진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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