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언니와 나는 작은 고모부와 작은 고모를 아빠,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작은 고모께 우리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셔서 그렇다고 들었다. 10년을 입 밖으로 꺼내보지 못한 엄마라는 말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고모와 고모부는 우리를 많이 챙겨주셨다. 여행 가본 적 없는 우리를 바다로 산으로 데리고 다니셨고, 군인이셨던 고모부 덕분에 수영장에도 가볼 수 있었다.
그때는 어려서 엄마에 대한 미움이 없었다. 그저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였다. 조금씩 자라면서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갔다는 생각에 엄마에 원망과 분노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엄마가 떠나지 않았다면 아빠도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갖게 된 미움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 더욱 심해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예쁜 아이를 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는지. 잠시만 떼어놓고 외출해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이를 볼 때마다 엄마에 대한 원망이 더욱 심해졌다. 그랬던 나도 아이가 조금씩 자라면서 키우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래도 내 자식이니까 견딜 수 있었다. 여전히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엄마는 나쁜 사람이었다.
남편과 별거를 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기 시작하면서 집안일, 회사일, 육아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매일 조금씩 자라는 아이는 괜한 투정을 부리는 일이 늘었다. 힘든 일 어려운 일을 말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했다. 그즈음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할머니는 경상도 분이셔서 그냥 하시는 말씀도 굉장히 화가 난 듯이 들린다. 우리한테야 연세가 많아지셔서 덜 하셨겠지만 정정하셨을 때는 어땠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창고에는 텐트와 낚싯대 그리고 엄마가 옷가게를 하다가 다 팔지 못한 옷들이 남아 있었다. 사진첩을 열어보면 아빠는 늘 친구들과 산과 강에서 즐거운 모습을 하고 계셨다. 갑자기 엄마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힘든 시어머니와 친구들이 좋아 매일 등산이며 낚시를 다니는 남편을 두었으니 그 힘든 결혼생활은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어른들 말씀으로는 터미널에서 옷가게를 하던 중 예전에 만났던 남자를 우연히 만났고, 그 후 그 남자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더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를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사실은 어떤 것인지 모른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서운한 마음에 늘 엄마에 대한 원망을 하셨다.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큰고모는 엄마의 힘든 시집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두 분의 말씀이 모두 맞으시겠지만 직접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니 사실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엄마도 여자라는 것.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엄마가 아닌 여자이길 바라고, 한 사람의 인격체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만큼 엄마도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엄마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40년 가까이 그 존재를 모르고 살았기에 감정이 무뎌졌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내 가족관계 증명서에 엄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못마땅하다. 새 남편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 두 명과 행복하게 잘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도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평생 내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꼭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여자로, 엄마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이제는 그렇게 살아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