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병원에 국제의료기관평가(JCI) 심사가 시작됐다. 4년마다 한 번씩, 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에서 나와 병원의 의료 수준을 꼼꼼하게 검증한다. 환자가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퇴원할 때까지의 전 과정을 13개 분야, 1,000여 개 항목으로 평가한다니, 그 까다로움이 짐작될 것이다.
평가가 다가오자 병원 곳곳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모든 직원들이 서류를 다시 점검하고, 트레이닝을 듣고, 환경을 정비하느라 분주하다. 나 역시 예방접종실에서 혼자 일하다 보니 이번 주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환자를 보면서 미뤄뒀던 교육을 들었고, 낡은 서류는 분쇄하고, 구석구석 먼지를 닦으며 정리했다. 근무 10년 만에 야근을 다해봤다.
조급한 마음에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실수를 했다. 컴퓨터를 켜려면 보안카드를 꽂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데, 몇 번을 틀리다 보니 계정이 잠겨버린 것이다. 결국 그 와중에 다른 부서로 가서 잠금을 풀어야 했다. 그런데 그곳 창구 앞에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고객이 몰려 서비스 수용 한도에 도달했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고객을 더 이상 받지 않습니다. 내일 다시 방문해 주세요.”
'업무시간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진짜?' 마음이 조급해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그 문구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와, 역시 미국 사람이다.’ 나도 평가 준비로 이미 하루 용량을 초과했는데, 그들은 “오늘은 여기까지”라며 단호하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 여유롭고 확실한 태도가 참 부러웠다.
몇 년 전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평가 준비가 얼마나 벅찬지, 우리나라 간호사들은 인증평가 기간에 퇴사까지 결심하기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이 기간에는 신규 간호사들에게 오프를 준다고 한다.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의 질문에 어리바리했다가 인증을 못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인증은 누구를 위한 걸까? 환자를 위한 걸까, 병원을 위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표준’을 위한 걸까?
그래도 이번 기회에 예방접종실의 묵은 먼지를 닦고, 오래된 서류를 정리했다. 준비자체는 부담스러웠지만, 정돈된 공간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앞으로는 묵은 때가 쌓이지 않게 평소에 조금씩, 그때그때 정리해야겠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퇴직 전, 한 번쯤은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까?
“오늘은 업무량 초과이므로 여기까지. 내일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