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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함구증

1부 : 적당한 거리

by 허씨씨s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나는 주기적으로 대학병원에 다녔었다. 말하는 것이 너무 늦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아주 명확하지는 않다.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여자 교수님이 여러 그림을 보여주며, 나에게 무언가 설명을 요구했던 장면만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 시절을 돌이켜보자면, 나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전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고, 나도 내 언어로 의사 표현을 하려면 할 수는 있었다. 분명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것이 내키지 않았었다.


김영하의 장편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주인공 동규 역시 나와 비슷한 처지를 겪는다. 그는 어린 시절에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유치원에도 못 가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되어서도 말을 하지 않아 농아 학교에 들어간다. 나는 그나마 8살 전에는 말이 트였는지 일반 학교를 진학하긴 했었다.

소설에서는 동규의 증상을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일종의 불안장애라고 묘사한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선택적 함구증은 '발화 능력에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는 장애'라고 나온다. 내가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시기에는 그런 진단명이 없었는지, 지금 부모님께 말해봐도 생소한 단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용어가 어린 시절의 내 상황을 잘 함축하고 있다고 느낀다. 당시의 나는 분명히 발화(發話)할 수 있었고, 드물지만 필요한 상황에서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저 선택적으로 함구(緘口)했을 뿐이었다.


소설은 동규가 선택적 함구증을 겪게 된 유력한 원인으로, 어머니가 뺨을 두 번 연속으로 맞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느낀 공포감을 묘사한다. 그런 순간은 분명 어린아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아마도 그때 느낀 무력감이 동규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소설을 보면서, 나도 동규처럼 어머니와 관련된 어떤 트라우마 때문에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추측은 얼추 맞는 것 같다. 어떤 부분에서만큼은 선명한 나의 기억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마음이 무척이나 여린 분이시다. 주변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 하시고, 웬만하면 본인이 져주시는 편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대개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때로는 아예 정반대로 행동하는 사람 역시 존재하며, 살다 보면 내가 싫어도 그런 사람들을 마주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결국 상처를 받고 혼자서 그 상처를 삭이는 것은, 대부분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느 때는 그것이 감당이 잘 안 되셨는지, 가장 편한 가족들 앞에서 화를 여과 없이 분출하시곤 했다. 아주 어렸던 나에게, 그런 장면들이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라고는 아마 생각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무의식 어딘가에 그런 장면들이 남아있다는 것도 예상하셨던 바는 아닐 것이다.

어머니를 탓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그 시절의 어머니를 이해하고, 어리고 무력했었던 나를 보듬어 주고 싶을 뿐이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마음이 따듯한 분이며, 어떤 순간에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 역시 어머니를 많이 닮아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동규는 마음속에서 굳어가는 말, 입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한 채 종유석처럼 굳어가는 것들을 제이라는 통역자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제이는 말을 못 하는 동규의 속마음을 제법 잘 파악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그런 맥락에서 소설의 제목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연히 제이가 동규의 모든 심중을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다. 가끔 제이가 엉뚱한 예측을 하더라도 동규는 스스로 의지를 접거나 자신이 원했던 것을 제이가 원하는 쪽으로 바꿔치워 버린다. 동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이가 알아차려준다는 것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동규는 제이가 원하는 것을 그냥 자신이 원했던 것인 양 믿어버리곤 했다.

동규가 말을 하게 된 이후,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 제이는 많이 변해있었다. 한 때 동규의 욕망의 통역자였던 제이는 더는 동규의 내면을 읽을 생각이 없었다. 부모가 이혼하고, 혼자 살던 아버지가 아이 둘 딸린 여자와 재혼을 하고, 그렇게 들어온 새엄마가 동규를 끔찍하게 불신한다는 정도의 일은 제이에게 진부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런 제이에게 동규는 실망하면서도, 동규는 제이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하며 기나긴 방황을 겪는다.


나에게는 제이와 같은 통역자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스스로 내 욕망을 말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덕분에 나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의사를 솔직히 표현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은 말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많은 대중 앞에서 발언하는 것이 아니면,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종종 듣기도 한다.

하지만 말로 내 진심을 전하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어려운 영역이다. 약속, 헌신, 낭만, 운명, 영원, 사랑, 용서 등. 말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말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전하기 위해, 말을 대신할 것을 찾은 것이다.

말은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뱉어지기도 하고, 발화된 순간이 지나면 금방 잊힌다. 반면에 글은 생각을 정제하여 보일 수 있고, 글이 쓰인 공간에 오래도록 머문다. 어떤 마음은 신중을 기하여 드러내야 하고, 그것이 오래도록 지켜지길 바라게 된다. 말보다 글이 더 적합한 표현 수단일 때가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선택적 함구증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음성으로 쉽게 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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