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에 고슴도치 몇 마리가 모여 있었다. 이들은 체온을 나누기 위해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로의 가시에 찔려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추위는 여전했고 고슴도치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은 다시 서로의 가시에 찔려 최소한의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소논문집과 보충논문집』
흔히들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사람들을 만나라고 말한다. 그 배경은 충분히 이해한다.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다만 문제는 '적당히'의 범위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가시의 길이가 각양각색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상황과 조건도 모두 다르다. 어느 날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탓에,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한 순간들까지 고려하여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여러 조건들을 전부 고려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다 보면 차라리 혼자서 지내는 게 더 편하다고 느껴지곤 한다. 애초에 모이지 않는다면 서로의 가시에 찔릴 일도 없고, 마주하는 사람마다 가시의 길이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라는 익히 들을 법한 충고나 조언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는 오히려 아래 시 한 구절로부터 더 큰 위안을 받았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단언컨대 살면서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간절한 믿음조차 쉽게 배신당하고, 큰 희생에도 아무런 보상을 못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시의 어조는 아주 단호하다. 이미 겪었던 상처의 경험 그리고 또다시 상처를 받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윤동주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시작을 알리는 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던 그 역시 알프레드 디 수자와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캐나다의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12가지 인생의 법칙 : 12 Rules for life』에서 말한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의 한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그 사람의 한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봤을 것이다.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를 넘어서 그 한계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가 진정한 사랑의 척도라면, 나는 아직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상대방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포용함을 의미한다. 자신의 상처를 넘어 타인의 상처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가시에 찔릴 위험까지 감수해야만 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