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서른을 넘어가니 슬슬 주변 친구들로부터 첫 자동차를 뽑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멋진 위용을 자랑하는 자동차는 남자들 사이에서 주된 화젯거리지만, 나는 유독 관심이 잘 안 가는 분야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우선 자동차가 별로 필요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집에 있는 걸 좋아하고 밖에 나가더라도 행동반경이 넓지 않아서,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게다가 자동차는 할부 값, 보험료, 각종 세금과 관리비 등 지속적인 고정지출이 발생한다. 수입이 충분히 그것을 감당하거나 생활에 자동차가 꼭 필요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면, 소비와 재테크의 관점에서 자동차 구매는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이다. 이런 이유들로 아마도 나의 장롱 면허 기간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경기권에 위치한 집 바로 근처 지하철역은 걸어가면 20분 정도가 걸린다. 버스를 타면 5분 안에 도착하는 거리다. 공원을 가로질러 가야 해서 날씨가 좋고 여유가 있을 때는 가끔 걸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환승이 되기에 대부분은 그냥 버스를 탄다. 서울 강북 지역을 가야 하는 경우에는 짚 바로 앞에서 고속터미널을 거쳐 남산으로 곧바로 향하는 광역버스를 이용한다. 어느 경우든 집 밖을 나서면 버스를 먼저 타게 되는 것이다.
버스를 타면 항상 기사님께 인사를 한다. 많은 경우 가족을 제외하면 하루 중에 처음으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이 버스기사님이다. 그래서 기사님도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에 아주 가끔 정색을 하거나 인사를 무시하는 기사님을 볼 때면 무안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대게 그런 분들이 운전도 난폭하게 하셔서 외출의 시작부터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그들이 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간단한 인사조차 주고받을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내면은 얼마나 황폐화되어 있을까. 아무리 사회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자신이 힘든 환경에 놓이더라도, 그것을 핑계로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곁에 둘만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인사를 잘하자. 기본 중의 기본이다.
지하철과는 달리 버스는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버스는 집뿐만 아니라 학교, 직장, 각종 문화시설의 바로 앞까지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러다 보니 그 공간에서 모일 사람들이 버스에서 먼저 만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교복을 입은 학생은 그 자체로 정겹다.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웃음꽃을 피우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부러워진다. 나도 한 때는 그랬었는데, 아닌가 나는 원래부터 쓸데없이 심각한 놈이었나. 이런 감상도 잠시, 버스는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하고 정문에 계시는 선생님이 늦었다며 아이들을 재촉한다. 우다다다 학교로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비추며 버스는 다음 정류장으로 향한다.
대부분 직장인에게 출근길은 천근만근 같을 것이다. 게다가 보기 싫은 동료나 윗사람을 직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만나면 얼마나 싫을까. 한 번은 버스에서 한 명은 계속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듣기만 하다가 점점 멍을 때리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지금 저 상황에 안 놓여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느꼈다. 당사자에게는 괴로운 순간이겠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그마저도 하나의 정경(情景)에 지나지 않는다.
작년 어느 날, 나는 동대문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고 기사님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청량리수산시장에 버스가 멈춰 섰고 할머니 한 분이 검은 봉지를 여러 개 들고서 버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곧바로 교통 카드를 단말기에 대지 않았고 대신에 돌아서서 정류장에 계시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얼른 가라고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이 너무나 애틋해 보였다. 나는 문득 저분들은 어떤 사이일지 궁금해졌다. 두 분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부부일까, 아니면 새로 만난 사이일까.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도 다정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었다. 전자의 경우라면 정말 두 분 모두 삶이 아름다운 분들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버스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거쳐가는 공간이다. 그러나 버스 안에서도 만남은 존재한다. 일면식도 없지만 인사를 주고받는 기사님이 있고, 우연히 혹은 미리 시간을 함께 맞춰서 함께 등교하는 학생들이 있으며, 지친 몸을 이끌고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있다. 헤어짐을 앞두고 아쉬운 마음으로 버스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도 존재한다. 모두가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이다.
오늘도 나는 버스를 탄다. 기사님께 반갑게 인사하고, 점심을 먹은 후, 헤어샵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헬스장에 들를 예정이다. 과연 오늘은 어떤 정다운 버스 풍경이 나를 맞이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