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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미 Apr 07. 2022

어울림

숲 한 모금, 쉼 한 조각_7일차 


같은 길을 걷는다. 

어김없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내뱉는다. 



내가 이 땅의 소유자라면 제일 먼저 이것부터 철거할거야.
색맹인가, 초록 숲에 시뻘걸 껀 뭐람
문맹인가, 개방성의 전형인 숲에 자물쇠 모양은 또 뭐람


약속없이 모였으나 자리잡은 후에 보면 모든게 어울리는 게 숲이다. 이 숲에서 단 하나 이질적으로 가슴을 조여오는 게 있다면 이 조형물이다. 



부적합에 부적격이야.



조형물이 정말 싫은가보구나. 부적합에, 부적격에 평가하는 말들이 막 올라오네. 

여기가 네가 걷는 숲의 시작점인데 혐오와 냉소로 산책을 시작하려고?



싫은 걸 어떻하나. 당췌 어울리지 않잖아.




여기가 상담실이라면 난 내담자와 무얼하나. 답은 간단하다.  

혐오를 만드는 건 평가이며, 평가를 만드는 건 잘 모르는 채로 분류함이다. 

현대 심리학은 인간의 혐오하기 쉬운 본성을 놓쳤다. 

잘 모르는 채로 대상들을 분류했고, 심지어 인간의 마음과 마음이 빚어내는 증상들도 분류했다. 관찰해야 하는 대상을 분류먼저 했으니 혐오하기 쉬운 인간 마음이 사랑보다 비평을 먼저 배운 건 당연하다. 


혐오하는 마음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 연결고리를 거꾸로 돌려야한다. 

잘 모르면 다가가서 탐색하고 관찰한다. 마음에서 올라오는 그 모든 분류와 평가에 일단 괄호를 치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탐색하고 관찰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어디한번, 오늘은 시작점부터 다시 살펴볼까? 




있는 그대로 자물쇠 보기_멀리 


<100m 앞에서 본 모양> 


검붉은 자주색. 

주변에 있는 나무와 나무로 만든 울타리보다 붉은 게 더 감도는 색이다. 자물쇠 안 쪽에는 하트문양이 있어서 멀리서 볼 때 사람들이 하트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았다. 그 위로 자물쇠 손잡이에 해당하는 연한 회색 아치가 있다. 크기는 바로 뒤에 있는 나무의 1/3정도 높이, 너비는 울타리 너비.  

이 구역은 누군가가 산책자를 위해 목적을 갖고 만들어 관리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암시를 준다.  




있는 그대로 자물쇠 보기_가까이



<50m 앞에서 본 모양> 


색맹인가?의 비아냥은 취소해야겠다. 

숲은 초록보다 갈색이 많다. 

오늘 등교길에서도 배운 바이다. 


나: 숲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봐봐

아들: 여전히 다 갈색이야.  


숲이 초록이라는 건 반만 맞는 말이었고 나의 주관적 이미지를 반영한 말이었다. 


있는 그대로 자물쇠 보기 _건너편



<자물쇠 문을 지나온 뒤> 


자물쇠 문 뒤는 주차장이라 이 조형물은 한 구역의 시작점이자 끝점이다. 조형물은 큰 나무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위치에 세워져있다. 눈으로 볼 땐 거대했던 조형물을 사진에서 보니 사실 나무의 1/3 정도 크기도 되지 않는다. 나무가 조형물에 가리거나 눌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오지랖이 무색하다. 나무는 생각보다 크고 굳건하고 건강하다. 나무는 계속 자라고 있고, 햇볓이 드는 방향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변화를 줄 수 있다. 나무는 살아있는 생명체고, 조형물은 인간의 발자국이다. 



사과인가 하트인가, 예술인가 기술인가



<마치 처음 본 것처럼 관찰하기> 

 

왼쪽에 꽂힌 화살은 이 조형물이 하트이기도 하고 사과이기도 하다는 만든이의 의도를 알려준다. 검은색의 조형물 안으로 딱 맞는 벤치가 있다. 

'아차, 해를 가려주려고 했네.'

 가까이에서 볼 땐 몰랐던 의도가 조금 멀리서 보니 보인다. 지나칠 땐 몰랐던 친절이 조금 머물러 보니 보인다. 

그 동안 흉물스럽게만 본게 조금 미안하지만 여전히 땅을 보고 내뱉는다. 

"나무덩쿨이라도 좋잖아..."




반만 보기_빨강 





<반만 보기> 


이렇게 놓고 보니 색의 대비가 확연하다. 

텍스쳐의 대비도 확연하다. 

숲은 대체로 거칠고 조형물은 반질하다.

조형물의 광택에 나뭇가지가 비친다. 

이 둘은 한 곳에 함께 있다.  






반만 보기_검정 


<반만 보기> 


이 조형물은 광택이 없다. 

굳건히 검은줄 알았더니 군데군데 색이 바랬다. 

조형물 너머로 보이는 나무는 길고 크다. 

이대로 부식되다가는 조형물은 10년이 안 가서 교체될 것 같다. 10년 후에도 나무들은 건강할 것 같다. 초봄의 초록이 이 정도니 여름이 되면 보다 진해지겠지. 

세상에....

나는 당췌 어떤 이유로 거대하고 그룹지어 있는 나무들에 연민을 품은걸까. 자기 존재가 작게 느껴지는 인간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라 이해해주렴.





 

같은 곳을 맴돌며 관찰을 하니 평소만큼 걷지를 못했다. 

같은 곳을 맴돌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것 이상일 것이다. 같은 곳을 맴돌지 않는다면 내 속도에 익숙해진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탐색하고 관찰할 수 있을까?

자물쇠문 안으로 들어갈 때의 마음에 비해 나올 때의 마음이 한 결 가볍다. 

혐오가 들어올 틈이 없다. 


내가 싫어하며 부적격이라 놀려댔던 이 조형물 역시 숲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가 힘을 쓴 '예술하다'였구나. 


공존 

  

같은 마음으로 연필선을 그었겠지. 

연필선과 똑같이 오리려고 노력했지만 벗어나버린, 아들의 색종이 찌끄러기들을 보면 웃음이 난다. 

나무 주변에 곡선을 재단하고 톱으로 깎으려다 벗어나버린 만든이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숲 안에 인간이 만든 작품들은 

숲을 배려하는 듯, 하지 않는 듯

자연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 그렇게 공존하고 있고

오늘도 나는 숲에서 겸손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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