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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미 Oct 11. 2022

계절비

숲 한 모금, 쉼 한 조각_8일 차

계절이 바뀌면서 오는 비에는 이름이 붙는다.

다시 한번 싱싱함을 바라며 반가운 봄비.

대비, 포기, 한계, 그리고도 life goes on 장맛비.

한 해를 정리하고 과거를 마주하게 하는 가을비.

 

사실 비는 그냥 오는데 우리는 내면의 꿈틀거림을 비에 실어 마음을 비운다.

투사. 인간의 이런 경향성을 투사라고 부른다.


투사(projection)

3. 자신의 성격, 감정, 행동 따위를 스스로 납득할 수 없거나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 그것을 다른 것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그런 방어 기제.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을 이른다.

<표준국어대사전, 투사의 세 번째 뜻>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투사의 정의는 정신분석에만 초점이 맞춰져 꽤나 지엽적이다.

욕구, 탓, 방어, 정당화, 무의식적인.... 정신분석이 좋아하는 단어들.

이렇게 들으면 투사가 마치 무시무시한 일을 일으킬 것만 같지만 사실 어떠한 방어기제도, 아니 어떠한 심리기제도, 미성숙한 채로 내보내는 모든 표현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니 투사가 문제가 아니라, 성숙과 미성숙의 문제일 것이다.  




넓게 보면 모든 것이 투사다.


앙드레 지드는 <좁은문>에서 여주인공인 알리사에게 자기의 고통과 환상을 투사했다. 이 작품이 본인의 자적적 사랑 이야기임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터인데, 작가는 굳이 성별을 바꾸어 알리사에게 자기를 투영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가페 사랑을 모방한 죄.

천상의 사랑을 환상하다 실제로는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유기한 죄.


작가 본인이, 자신의 배우자였고 사촌이었던 실제 여인에게 저지른 과오를 덜어내고 싶었던 거겠지. 역할을 바꾸어 탄생한 인물이 알리사이다. 좁은문의 사랑을 선택하여 끝까지 우아한 모습을 지켜낸 알리사는 여성이기에 대중에게 조금 더 용서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양립할 수 없는 사랑의 모순을 '좁은문의 사랑'이라는 환상에 버무려버린 작가의 투사적 인물이다.






비오는 가을숲

"비 오는 날이 좋더라. 울고 싶어도 울음이 안 나오는 날들이 있었어. 쏟아지는 빗소리가 꼭 대신 울어주는 것 같아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더라고."


이 말을 듣고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쳐다보던

내담자의 눈빛이 기억난다.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의 마음속에 그어진 건

당신도 그랬느냐는 공감이었을까,

당신은 전문가잖아라는 당황이었을까,

지금 힘든 자기도 당신의 역할이 가능하겠느냐는

미래에 대한 안심이었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비를 보면서, 서로 다른 것을 투사하지만, 투사라는 공통적인 심리적 현상을 공유하는 존재의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저기 떨어진 도토리

"여전히 비 오는 날을 좋아해. 비가 오는데 운 좋게 일이 없으면 뜨거운 차 한잔을 만들어서 숲으로 가.

비 오는 숲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비 오는 숲을 좋아해서 나오는 사람들이야. 내 맘대로 해석한 연대감을 그들에게 느끼지. 착각이 아닐까 싶을 땐 실험을 해봐. 우산 속에서 한껏 미소를 띄워보내면 그들도 웃으며 반응을 할 거야. "


여전히 비를 좋아한다. 울고 싶어도 울음이 안 나오는 날들은 거의 지나온 듯하다.

어떻게 견디는 게 좋을지 고민을 하면서 견디다 보니 비가 주는 위로가 바뀌었다.

그때는 대신 울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지금은 더 큰 연대감이 필요한 거지.

내리는 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여전한 투사이다.



비 오는 숲은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에서도 내면의 천진함을 읽어낼 수 있는,

투사가 매우 잘 일어나는 therapeutic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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