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이 있을 뿐
얼마 전 대학동기의 요청으로 대학생들을 만나 강연을 하는 자리를 가졌다. 입사하여 사회인이 된지 2년이 훌쩍 넘어 3년이 되어 가는 이 시점,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다음 내 인생은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였다. 대학생들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아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짧지만 여태껏 내가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게 가장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강연 준비를 위하여 20살의 대학시절부터 대학원 그리고 현재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지금까지 내 인생을 총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언젠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력을 가진 대학원에서 만난 선배에게 "언니는 어떻게 대학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어요?"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돌아온 대답은 "몰라~ 그냥 어쩌다보니"라는 말이었다. 자신의 독특한 인생의 여정은 모두 선택들의 결과라고 했다. 그 당시 나는 열심히 목표를 세우고 개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치밀하게 조사 후 이행하면 내가 설계한 인생의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어떤 행위의 실행이 지연되기도 하고 경로를 바꿔야 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계획하고 바라는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는 모든 상황이 나의 문제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반복적인 성찰을 통해 내 안에서 원인을 찾고자 했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 내 인생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지금 내 생각이 맞을까?’ 와 같은 생각들은 나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분석하고 생각하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한동안 나는 내 자신을 검열하고 교정하는 것이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가장 효력 있는 방법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 자신에게 몰입하는 데 과도한 에너지를 쏟다보니 스스로의 부족한 점만 눈에 들어오고 약점을 파고들게 되더라. 특히 불안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신의 결점을 더 크게 주목하게 되어 오히려 계획 수립과 추진에 장애가 생겼다.
'내 주변 상황이 문제일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규범과 윤리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비상식적인 상사들, 그리고 허례허식과 권위의식에 갇혀 비효율을 조장하는 조직문화와 업무환경 같은 외부요인들이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주변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때도 있었다. 사회문제들은 모두 체계와 구조의 허점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했고, 소수의 합리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잘못된 결정들이 나의 이상향과 목표 추구를 방해한다고 느낀 그 당시 너무 힘들었다. 원인을 주변세계에서 찾고자 하니 이 또한 내 의지로는 바꿀 수 있는 게 크지 않은 터라 무력감을 느꼈다. 또한 모든 것들이 내가 극복해야만 하는 극도의 시련으로 인식되었다. 자기연민으로 인한 허무주의에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의지마저 상실한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현재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많이 하는만큼 앞으로의 인생을 더 명확하게 예측하거나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 오랜 고민 끝에 얻어낸 머릿 속의 결론은 정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머릿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실제 행동으로 실현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효능이 없기 때문이다. 내 자신과 주변세계에 대해 분석하고 곱씹는 행위 자체는 사실 나의 고통의 크기를 키우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오히려 복잡한 생각 없이 언젠가 해놓은 일, 꾸준히 하고 있는 일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빛을 발하게 되거나 내가 빛이 나는 데 도움이 될 확률이 더 높다. 어느 날 뒤를 돌아봤을 때도 그랬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위해 애쓰고 고생한 것보다 힘을 빼고 상황에 몸을 맡기 듯 충실하게 지속해온 것들이 결국에는 더 큰 결과로 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한다.
대학원 선배의 말과 같이 내가 어쩌다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전공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대학원에 왜 가게 되었는지, 돌연 취업을 하게 된 경위까지 사실은 어떤 것도 나의 강력한 의지나 뜻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들은 아니었다. 그저 무엇에 대한 작은 관심이 나를 행동으로 이끌었고 당시에는 큰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심함으로 시작한 행동들이 꾸준한 결과로 남아 다른 곳으로 나아가는 데 발판이 되기도 했다. 현재 내가 좋아하는, 관심이 가는 것들에 애정을 가지고 조금씩 시간과 노력을 쏟다보면 그것이 어느날 꽤 괜찮은 모양새를 갖추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인생에는 각본이 없다. 순간을 성의있게 만들고 적재적소에 작은 결실들을 써먹을 줄 아는 영리함만이 내 운명을 개척하고 새롭게 열어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