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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링 Oct 25. 2022

나에게 다른 역할이 들어왔다.-1

드레스보다는 한복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전통혼례를 했다. 드레스는 나중에 언제든 입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드레스를 나중에 언제든지 입을 수 있다니? 대학 가면 살 빠지고 남자 친구 생긴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나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멍청했다. 


어쨌든 결혼식은 드레스건 한복이건 십 년이 지난 지금 사진을 들춰보니 예쁘다. 아주 예쁜 한쌍이다. 


전통혼례에는 주례가 없다. 그래서 아빠의 지인이신 김정옥 선생님께서 축사를 해주셨는데, 연극 연출을 오래 하신 분이라 그에 걸맞은 멋진 축사를 해주셨다. 정신없을 때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결혼도 인생도 연극과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이제는 아내라는 역할이 더해진 것이라고.


그렇다. 결혼 전에는 딸이라는 역할만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순식간에 여러 가지의 역할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아내, 며느리, 올케, 외숙모, 처남댁 그리고 예전과 달라진 큰딸이라는 역할, 마지막으로 엄마라는 역할까지 모두 내가 한꺼번에 소화해야 했다. 배우는 이렇게 많은 역할을 맡으면 돈이라도 많이 벌 텐데...


하지만 난 많은 역할을 해야 하는 1인 다역임에도 내 프로그램은 매일매일 즐거움을 주는 시트콤이길 바랬다. 내 인생이 신파 가족 드라마 또는 아침 막장 드라마가 되는 건 절대 싫었다.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매일매일 시트콤처럼 흘러갔다. 다양한 역할에 재미있을 때도 있었고 지칠 때도 있었지만 내가 주인공인 이 시트콤은 슬픈 일도 적당히 슬프지 않게 연출되었고 아주 많이 행복한 에피소드도 중간중간 있었기에 롱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내 마음은 이상해졌다. 내가 주인공인 시트콤인데 내가 없었다. 나에게서 아내, 엄마, 딸, 며느리를 빼면 내가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직장인이었고 그 전에는 학생이었다. 그 역할은 이미 회차가 끝나서 빠져버린 역할이었다. 


내가 누군지 원래 어떤 캐릭터인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동네 엄마와 학부모라는 역할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주변에 그런 배역을 가진 사람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은 더이상 시트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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