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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링수링 Nov 24. 2021

심장을 만지다.

 1.


얼마 전 이십 대를 온전히 같이 보낸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오랜만에 다 같이 만났다. 그 사이 그 녀석은 결혼을 했고 예쁜 딸도 생겼다. 서로의 사는 이야기가 허공의 공처럼 무심하게 주고받아질 무렵 옆자리로 다가온 그 녀석은 취기가 올라 발개진 얼굴로 나에게 나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첫사랑은 너였던 거 같아. 자전거를 탈 때 마다 네 생각이 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풍선이 생기더니 그 중에 하나가 톡 터졌다.


“너는 연우 좋아했잖아.”

“그런 줄 알았지.”


나도 몰랐다. 얼굴 보면 너무 좋고 떨리고, 만나기로 하면 긴장되는 그런 사람이 사랑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 녀석과는 스무 살에 동호회에서 만났는데 밤에 무료인 핸드폰 요금제가 똑같다는 이유로 우리는 밤새 통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고 각자 좋아하는 사람에 관해 의논도 했다. 내 친구 연우를 좋아했던 그 녀석은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그녀에게 직접 전해 주지 못하겠다며 나에게 주곤 했었다. 내가 전해주려고 하긴 했지만 연우는 받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었고 그 녀석은 나보고 들으라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나를 향한 마음이었을까. 동호회 친구들이랑 만날 때면 언제든 함께 했고, 나에게 항상 피자를 사달라고 졸랐었다. 어떤 음식이든 내가 배불러서 못 먹겠다고 하면 너무 좋아하며 남은 건 자기가 다 먹었고, 내가 짜증을 내도 귀엽다고 웃어버리곤 했다. 인기 많은 어떤 친구를 부러워했더니 너랑 걔랑 다를 바 없이 예쁘다고 말해 주었던 녀석. 술 취하면 나한테 팔짱을 끼던 귀여운 그 녀석.


당시 동호회 선배님 중에 ‘이소라의 프러포즈’ 관계자 분이 계셨다. 개인적으로 신청하는 몇 명에게는 가끔 표를 주시곤 했었는데, 나도 신청을 해서 표를 받기로 했었다. 당연히 그 녀석과 함께 가기로 하고 우리는 여의도공원에서 만났다. 꽤 이른 시각 표를 먼저 받아야 했기에 녹화시작까지 시간이 남아 자전거를 빌리기로 했다.


“나 자전거 못 타는 것 알잖아.”

“내가 앞에 탈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2인용 자전거를 빌렸고 여의도 공원을 계속 돌기만 했다.


“야, 페다알 윙윙위윙 구울우웅.”

“뭐라고? 안 들려~”

“개 힘들다고오오농 옹우웅.”


앞에서 말하는 목소리는 뒤에서 잘 들을 수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 둘이서 만난 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이소라의 프러포즈에서는 김조한이 나왔고, 한석규가 나왔다. 노래보다는 자전거를 타던 바람소리가 더 선명했던 그날. 자정을 향해 가는 지하철에서 예전과는 다른 공기가 흘렀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그 녀석은 군대를 갔고 가끔 휴가를 나오면 같이 영화도 보러 가고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지만 우리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각자 연애를 시작하고부터.


오랜만에 만난 그 녀석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첫사랑도 그 녀석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말이 있는 걸까. 당시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도 못했었으니까. 그 녀석이랑 있을 때처럼 편안하고 수많은 대화가 오가고 웃음이 끊이질 않고 내가 뭘 해도 귀엽게 봐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확실해 졌을 때 ‘오빠 ’를 만났다.


2.


“그럼 이제 뭐라고 부르면 되요?”


오른쪽 보조개가 쏙 들어가며 그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은 내비게이션의 이응과 삐읍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동안 나에게는 ‘오빠’가 없었다. 친 오빠도 없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는 오빠라는 호칭을 쓰기는 했지만 나만의 고유명사가 될 오빠는 없었지. 나에게도 드디어 오빠가 생기는 걸까. 차에서 내리니 그가 겉옷을 입혀주며 말한다.


“이제 옷은 내가 항상 입혀줄게요. “


따뜻한 공기가 사방으로 퍼지는 느낌과 함께 내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한다. 그가 내 어깨를 잡고 앞으로 돌아 세우며 뭐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고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불덩이처럼 굴러다니는 순간 그가 어깨에 있는 손을 순식간에 내려 내 손을 잡았다.


돌아서서 우리 집까지 어떻게 걸어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홍색 투명 공안에 내가 들어가서 걸어온 기분. 집에 와서도 한참을 거실 소파에 겉옷을 벗지 않고 앉아있었다. 감전 된 것처럼 온몸에 분홍빛 전류가 흐르고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사랑은 분홍빛이 아니라고, 떨리는 감정만으로는 같이 할 수 없다고 그 동안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이 사람 진짜일까? 나 실수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몇 번의 데이트 후 어느 날 같이 밥을 먹는데 웃으며 나에게 그거 남긴 거냐고 오빠가 묻는다. 그리곤 가져가 맛있게 먹는다. 내 심장은 이제야 안정된 심박으로 돌아오며 나의 온몸을 따뜻한 피로 채운다. 이제는 안다. 누가 내 심장을 만지는 것이 어떤 건지. 심장을 정상 박동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래서 늘 안정적인 심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첫 번째 사랑이 아닌 두 번째 사랑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것.



물론 이제는 겉옷을 입혀주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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