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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링 Oct 28. 2022

나에게 다른 역할이 들어왔다.-2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나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전공을 디자인이 아닌 공예를 선택한 이유도 거기에 포함된다. 시작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완성되는 것. 그리고 언제든 만질 수 있는 것. 공예가 그래서 좋았다. 이건 디자인과 공예, 예술에 대해 논하는 게 아니다. 그저 내 성향이 그렇다는 거다.





1. 동네 엄마


아내와 엄마가 된 이후 나의 책상에서 할 수 있는, 나만의 것은 대부분 요리였다. 요리라기보다는 끼니라고 하는 게 맞겠다.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그럴 때는 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빴지만 반대로 심심하기도 했다. 아이가 낮잠을 자면 언제 깰지 몰라 식탁에 앉아서 뭘 시작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기 일쑤였다. 


아이를 재울 때면 형님이 잔뜩 물려주신 그림책을 읽어주곤 했다. 그림책이란 건 조금 이상했다. 자꾸 읽어주면서 내가 목이 메었다. 아이를 낳아서 호르몬 변화가 생긴 건지 툭하면 눈물이 난다. 내가 저 작은 존재의 보호자가 되어서 그런 걸까? 그림책은 대부분 사랑과 자존감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나를 사랑할까? 모르겠다. 이 짧은 책을 읽으면서 자꾸 눈물이 난다.


아이가 건강한 밥을 먹었으면 해서 요리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림책도 더 잘 읽어주고 싶어서 그림책 수업도 찾아서 듣기 시작했다. 분명 아이를 위해 시작한 일인데 이상하다. 어디를 가도 나를 돌보라고 한다. 건강한 식재료로 건강하게 먹는 건 나를 돌보는 것이라고 한다. 엄마인 나를, 엄마가 아닌 나를 찾고 돌보라고 한다. 그림책을 읽으며 내 감정을 나누라고 한다. 모든 건 나를 돌보고 사랑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행복해진다고 한다. 


내가 아이가 아닌 나를 먼저 돌보고 사랑하는 일을 해도 될까? 내가 원하는 나의 것을 찾으러 다녀도 될까?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내가 쓸데없는 일을 시작한 뒤로 마음 한편이 불편했던 거다. 게다가 제일 불편한 건 이 일이 나만의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언제든 내가 하는 걸 똑같이 만들 수 있고 나보다 잘할 수 있는 일.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느라 아이에게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한없이 나 자신이 초라해진다. 


아이가 커가면서 나의 시간은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이 시간을 동네 엄마들과 담소를 나누는데 쓰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고부터는 엄마라는 역할 외에 동네 엄마와 어머니라는 호칭을 가진 역할이 생겼는데 그게 꽤 재미있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오전엔 동네 엄마들과 동네 맛집을 다니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지냈다. 이 만남의 메인 음식은 아이였고 신랑은 디저트였다. 이들과 있으면 지금 내 모습이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엄마만으로 충분하다는 느낌. 그거였다. 나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가끔 마음이 통하고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하는 일을 말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겉으로 부러워하거나 속으로는 인정하지 않거나 두 가지였다. 가끔 다시 만나면 아직도 그거 하고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그들과 있으면 좋았다. 따뜻했고 안심되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내 책상이 식탁인 것이 싫었다. 내 공간이 주방이라는 게 싫었다. oo엄마라고 불리는 게 싫었다. 아이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 



2. 다시 꿈꾸다.


아이가 커가며 그림책을 다양하게 접해볼 기회가 많이 생겼다. 그림책은 얇지만 단순하지 않았다. 한 장 한 장이 작품이었고 글은 한 편의 시였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림책은 누구나 가질 수 있었으며 만질 수 있었다. 아! 내가 어렸을 때 그림책 작가라는 직업이 있는 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 날 동네 그림책 도서관에서 그림책 만들기 수업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 모인 사람은 모두 엄마였다. 까짓 거 지금 시작하면 뭐 어때. 나는 그렇게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3. 그림책 작가 지망생


그림은 내 손으로 직접 창조하는 하나의 생명체다.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고 나 역시 누군가를 따라 할 수 없다. 그려지고 완성되면 그건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그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재능과 열정과 연습이 필요했다. 다른 모든 일이 저렇겠지만 나에겐 물건을 만드는 일보다 그림이 더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책상과 내 손, 적절한 시간이 있으면 가능했다. 먼저 시작한 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과 비교할 게 없다. 나는 나만의 속도로 조금 더 시간을 길게 가지고 그려내면 된다. 내 이야기를 내 생각을 내 소망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림책. 난 그림책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망상으로 끝나지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 중에 자신 있는 건 있었다. 성실함과 용기. 그리고 내 이야기를 사랑하는 마음. 산 중턱까지 올라가지도 못할 걸 알지만 한번 올라가 봤기에 다시 올라가는 건 처음보다 쉬울 거라는 것. 그걸 알기에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쉽지 않았다. 내 마음만으로 기회는 오지 않으니까. 


카톡, 카톡.

모르는 단체방에 초대가 되었다. 

작가님이었다. 도서관에서 함께 그림책을 만든 작가님. 늦지 않았다고 계속해보라고 용기를 주셨던 작가님.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림책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오다니 정말 기뻤다. 이 마음, 이 순간을 아끼고 아껴서 소중히 담아놓았다.



4. 나에게 시간을 주자.


1년 2년 3년.. 시간은 흘러갔다. 몇 번의 공모전도 낙선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은 정말 많았다. 내 이야기는 내가 봐도 한숨이 나왔다. 내가 이걸 한다 해서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주변에 책을 낸 사람들도 하나둘씩 늘어 갔고 알고 보니 이미 책을 낸 작가들도 많았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더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나까지 그림책을 해야 할까? 내가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 건 분명히 망상일 거야. 아무래도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주고 있는 것 같아. 난 운도 없고 재능도 없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릿속엔 저 말들이 맴돌았다. 


바닥을 기어가는 것 같아도 나에겐 희망이 있었다. 아니 멈추지 말고 꼭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로 태어났으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 내 인생에 악역이 종종 등장하는 이유.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는 것. 이 모든 건 해피엔딩으로 가기 위한 서사니까. 


나에게 시간을 주자. 그리고 내 시간을 확보하자. 지금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5. 드디어 나에게 다른 역할이 들어왔다. 


그림책 계약은 그동안 내가 예측했던 그 어떤 감정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기쁨이었다. 내가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고, 원래의 존재로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고민했던 모든 시간과 살아오면서 불편하다고 생각된 모든 일들이 풍선 터지듯 뻥 없어졌다.


더 이상 주방의 일이 내 일이 아니었다. 엄마도 아내도 딸도 며느리도 다 내 일이 아니었다. 집안일도, 그 어떤 일도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감사하고 기쁘게 '그냥' 하면 되었다. 내 일은 그림책을 만들고 그리는 '그림책 작가' 다. 그러니 다른 모든 일들은 부가적인 것들이었다. 이제야 내게 주인공 역할이 들어온 거라고! 


기쁨과 함께 걱정도 늘었지만 내 존재에 대한 내 마음은 달라졌다. 어디서든 얼굴을 들고 여유롭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자. 이제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 앞으로의 내가 기대되고 벌써 사랑스럽다.


쓸데없는 짓은 쓸데없는 짓이 아니다. '짓'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하나씩 할 때마다 내 주변은 사랑으로 충만해진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하며 살 거다.


난 유일무이한 내 인생의 주인공이니까.







이전 15화 나는 대체 불가가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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