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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링 Oct 24. 2022

나의 중간세계


널드 위니코트의 <충분히 좋은 엄마>를 읽고 있다. 영국 BBC 라디오에서 약 20년간 일반 부모들을 대상으로 방송되었던 위니코트의 육아강연 중 일부를 엮은 책인데 금쪽이 보다 더 금쪽같은 이야기가 가득이다.


특히 내 마음에 꽂힌 단어. 중간세계. 



엄마들은 저에게 아기가 쥐고 놀았던 갖가지 물건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줍니다. 아기에게 소중해져서 아기가 빨거나 끌어안는 물건들이죠. 그것들은 아이가 외롭고 불안정한 순간을 넘기도록 도와주며, 위로를 제공하거나 진정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 대상은 반은 아기의 일부이며 반은 세상의 일부입니다.


이러한 최초의 놀이 대상과 놀이 활동은 아기와 외부 세계 사이에 있는 세계에 존재합니다. 아이가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우리는 이러한 발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충분히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아이는 사물을 구분하기 시작하고,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를 돕기 위해서 우리는 중간 세계를 허용해야 하는데, 이곳은 개인적인 동시에 외부적이고,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손을 빨고 애착을 가지는 물건들이 생기는 것이 아이들 만의 중간세계라고 위니코트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중간세계는 무엇일까. 이미 어른이 되어서 중간세계가 필요 없어진 걸까? 그건 아닐 거다.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지만 또한 둘 다인 것. 


중간세계 없이 어른이 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어떤 일을 결정하고 그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어른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중간세계가 필요하다. 나는 어른이지만 매일 매 순간 어른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의 중간세계는 그림이었고 상상이었고 1인 연극이었다. TV 만화 속에서 누군가가 죽을 정도로 다치는 것을 보면, 주인공이라 죽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누군가가 총에 맞는 장면을 몇 장씩 그려내기도 했고, 독약을 먹고 결국 죽음을 맞게 된 줄리엣을 혼자 방구석에서 연기하며 안정감을 찾았다. 내가 그린 그림에서는 언제든 주인공은 살 수 있었다. 내가 연기하는 비련의 주인공은 내가 연기에서 깨어나면 언제든 살아났다. 돌이켜보면 그때 생긴 나의 중간세계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주변의 변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내가 8살이 되던 해 3월에 돌아가셨다. 


중간세계 덕분에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만날 수 없는 지구의 먼 곳에 가서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우리는 우주 속에 같이 있다고 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사촌오빠의 이른 죽음과 예쁘고 친절했던 나의 과외선생님의 죽음을 큰 상처 없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 나의 중간세계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내적 세계와 타인과 공유하는 외적 현실 사이의 중간 지대.


남들이 써놓거나 올려놓은 사진을 보며 그들의 삶을 공허하게 구경하는 것. 그건 비현실적 느낌을 준다. 나에게 진짜는 내가 쓰는 글이고 내가 하는 이야기다. 내가 쓰는 글과 생각이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중간세계이다. 


지금은 개인적인 내적 세계일 뿐이지만 분명 이 이야기는 밖으로 걸어 나가서 이전에 어느 누구도 산 적 없는 유일무이한 삶이 될 거다. 난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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