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과거를 듣는 여자
“박인영입니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민지의 네일아트샵에 조용한 발걸음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어떤 디자인으로 해드릴까요?"
민지가 네일 컬러 샘플을 보여주며 물었다.
"음... 연한 핑크 그라데이션에 작은 큐빅 포인트로 해주세요."
민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물이 담긴 작은 그릇을 가져왔다. "먼저 손을 담가주세요. 큐티클이 부드러워질 때까지요."
민지는 부드럽게 큐티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푸셔로 큐티클을 조심스럽게 밀어 올린 뒤, 니퍼로 거친 부분을 정리했다.
"베이스 젤을 바를게요. 이게 컬러 젤의 지속력을 높여주죠.“
민지는 박인영이 중간 중간 침을 크게 삼키는걸 느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혹시, 힘들거나 고민 되는게 있으세요? 보통 이 시간대 손님들은 사연이 있는 분들이 많아서요.”
"이상한 얘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사람들의 하루 전 과거를 들을 수 있어요."
민지의 손이 잠시 멈췄다.
"무슨 뜻이죠?"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방의 어제 과거에 대한 소리가 들려요.“
“그래요?, 그것 참, 편리하면서도 불편하겠네요”
“불편할 때가 훨씬 더 많아요. 전날 상대방이 누군가와 나눈 대화, 했던 행동들... 마치 귀에 라디오가 달린 것처럼 모든 게 들리거든요. 그래서 가능한 한 대화를 피하게 돼요"
민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지금 제 어제 일도...?"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보통 대화를 좀 나누다 보면 들리기 시작해요. 그래서 가능한 한 대화를 피하는 거죠."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에는 이 능력이 신기했지만, 곧 고통이 되었다고 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보면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전날 범죄를 저지른 소리가 들리기도 했어요. 한번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있었어요..."
여자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밖에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던 남자친구가 전날 다른 여자를 만나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모든 게 생생하게 들렸어요."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걸 알면서도 저는 남자친구에게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걸 속앓이 하다가 그냥 넘겼어요. 그 뒤로는 남자친구를 만날 때마다 과거의 소리를 들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런데 자꾸 더 궁금증이 자라났어요. 결국은 제가 아무 이유없이 연락을 끊고 멀리했어요. 차라리 그때 물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로 박인영은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누군가가 제 비밀을 알아버린다면, 아무도 저에게 가까이 오지 않을 거예요. 괴물 취급당할 테니까요.“
박인영이 말하는 동안 민지는 인영의 손을 자외선 조명에 번갈아 넣으며 손톱 젤을 딱딱하게 구웠다.
“제가 클렌징하는 동안 제 과거를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돼요. 그냥 음악만 좀 나올 거에요”
박인영은 눈을 감고 찬찬히 민지의 하루 전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 비 내리는 밤이었다. 민지의 방 안에는 나긋나긋한 바이올린 소리와, 잔잔한 피아노 건반 반주가 박인영의 귀를 간지럽혔다.
“윌리엄 볼컴의 ‘우아한 유령’이에요. 가끔 저는 귀에 꽂히는 음악을 한시간씩 반복해 들을 때가 있어요.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너무 편안해지거든요. 또 오시면 제가 하루 전에 좋은 음악을 몇 개 골라서 들어볼게요”
박인영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