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는 작은 골목길 끝에 위치한 네일아트샵 '핑거팁스'의 주인이었다. 한때는 꽤 인기 있던 가게였지만, 요즘은 손님이 뜸했다. 거리에 비슷한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경기 침체로 사람들은 먼저 네일아트 같은 사치를 줄이기 시작했다.
월말이 다가오는 어느 날, 계산기를 두드리며 한숨을 쉬던 민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골목길은 한산했고, 오늘도 예약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이번 달 임대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음 날 아침, 민지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가계 문앞에는 이런 문구가 붙었다.
‘비밀 지켜드립니다. 예약만 받습니다.’
#1 얼굴이 지워진 남자
“조현탁입니다.”
금요일 저녁에 나타난 예약 손님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민지가 인사를 건네자, 남자는 조심스럽게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민지는 숨을 들이켰다. 남자의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없었다. 밋밋한 피부만 있을 뿐이었다.
"놀라셨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이 없는데도 말소리가 나오는 것이 이상했지만, 민지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제 얼굴에 표정을 그려주세요. 오늘은 친구들과 만나는 날이라 활기찬 미소가 필요해요."
민지는 손님의 요청대로 얼굴에 표정을 그려주기 시작했다. 먹선으로 윤곽을 잡고, 아크릴 물감으로 생동감 있는 미소를 만들어갔다.
"어떻게 이렇게 되셨나요?" 민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3년 전 일이에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얼굴이 사라져 있었어요. 의사들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죠."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얼굴을 더듬어 보면 눈 코 잎은 그대로 있었지만, 보이는건 그냥 달걀귀신 같은 모습이었어요.”
이 남자는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나서 자신의 얼굴을 정성껐 그렸다. 티가 나지 않도록 뿔태 안경을 쓰고, 되도록 회사에서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 그러다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3년 전 여름이었어요. 그날 따라 폭염 주의보가 내려졌었는데, 저는 거래처 4곳을 돌며 외근을 다녔어야 했어요. 회사에 들어오고 한참 뒤에서야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았어요.”
자리에 앉아 티슈로 땀을 닦은 것이 화근이었다. 결제 서류 사본을 복사하는데, 한 여직원이 자신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남자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거울 속 자신의 코가 이미 무너져 있었고, 입도 반쯤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급히 화장을 고치고 나서 건강을 핑계로 조퇴했지만, 오래 다닐 수가 없다고 판단히 회사를 그만 뒀다고 한다.
"처음에는 충격이었어요. 하지만 점차... 이것이 저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걸 깨달았죠. 이제 저는 진정한 '빈 캔버스'가 되었으니까요.“
지금은 배달부터 편의점까지,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민지는 작업을 마무리하며 거울을 건넸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는 생기 넘치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완벽해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기뻐했다.
그 후로 '얼굴 없는 남자'는 정기적으로 가게를 찾았다. 때로는 진지한 비즈니스맨의 얼굴을, 때로는 부드럽고 푸근한 표정을 가진 얼굴을 요청했다.
어느 겨울날, 남자는 평소보다 들뜬 표정(물론 민지가 그려주는)으로 가게에 찾아왔다.
"오늘은 특별한 약속이 있어요," 그가 말했다. "저와 같은 사람을 만났거든요."
민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얼굴이 없는 다른 사람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쳤어요. 서로 알아보는 순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유대감이 느껴졌죠."
그날 민지는 남자의 얼굴에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표정을 그려주었다. 그리고 몇 주 동안, 남자는 데이트를 위한 다양한 표정들을 요청했다.
사랑에 빠진 듯한 그의 모습을 보며 민지는 기뻤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난 후, 남자는 예전과 달리 침울한 모습으로 가게를 찾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민지가 물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민지가 천천히 그의 밋밋한 얼굴에 기본적인 윤곽을 그리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관계를 끝냈어요."
"왜요? 잘 지내시는 것 같았는데..."
"제가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었어요," 그가 말했다. "표정이 없으니까... 진심을 알 수 없었죠. 제가 슬플 때 그녀도 공감하는 것 같았지만, 제가 기뻐할 때는... 그녀의 진짜 감정을 읽을 수 없었어요."
민지는 붓을 내려놓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죠. 다른 사람들도 저를 볼 때 똑같은 느낌일 거라고요. 제 진짜 감정을 알 수 없으니까요."
민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붓을 다시 들었다.
"오늘은 어떤 표정을 원하세요?"
남자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말했다. "진짜 제 마음을 보여주는 표정이요. 슬프면서도... 희망이 있는..."
민지는 천천히, 정성스럽게 그의 얼굴에 표정을 그리기 시작했다. 약간의 슬픔이 배어있지만, 동시에 따뜻한 희망이 담긴 미소를.
작업을 마치고 거울을 건네자, 남자는 오랫동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 제 모습인가요?"
민지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본 당신의 모습이에요.“
가게를 나가는 남자의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