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그랬다.
이 전처럼 가만히 머무르기만 했던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여기가 아닌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하고 싶었다.
어디에 주차해 놓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차를 찾아 잠시 동네를 서성이다 겨우 시동을 걸었다.
오랜만에 나온 바깥세상에 내 피부는 서늘했고 바람은 많이 불었으며 온 세상은 구름에 뒤덮여있었지만, 약간의 여유로움일까. 멀찍이 보이는 팔각정 위엔 구름 한 뭉텅이 비워진 그 사이로 쨍한 햇살 무더기가 쏟아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의자에 앉아 잠잠히 머물러 있던 엔진이 예열되기를 기다린다. 본네트 위 켜켜이 놓여있는 먼지들로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랜 날 동안 박동하지 않았을 엔진의 고동 소리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린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노래를 튼다. 엊그제 친구들이 의도적으로 놔두고 떠났던 투명한 통에 담긴 커피를 급하게 벌컥 인다. 얼음을 너무 많이 넣어서일까. 바닥을 굴러다니는 낙엽들보다 가벼운 커피 향기가 입가에 잠시 잠깐 머물렀다 바람에 휩쓸려 떠나간다.
어느덧 엔진의 움직임은 일천 알피엠 아래로 떨어지고 내비게이션은 말했다.
'경로 안내를 시작합니다. 목적지까지 34분 남았습니다.'
그날은 그랬다.
여전히 초라한 내 모습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랄까.
마음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구름 사이에서 부서지는 햇살처럼 사방으로 흐릿하게 퍼져나간다. 더욱이 흔들린 감정들은 내 눈을 가리고 앞을 가로막고 주변의 모든 것을 휘젓는다.
"여자에게 있어 가장 아쉬운 것은 가장 아름다울 나이에 기다리지 못할 남자를 만난 것이고,
남자에게 있어 가장 아쉬운 것은 가장 능력이 없고 초라할 때 평생을 지켜주고 싶은 여자를 만난 것이 아닐까" - 출처 인터넷 -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산으로 향했다.
눈 아래 보이는 모든 세상이 구름에 뒤덮여 바다처럼 보인다는 사성암.
그 모습이 보고 싶어 향해본 구례. 허나 사성암 중턱 즈음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대지였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운무는 바람이 약하고 기온이 낮은 이른 아침에 보인다는 걸.
허나, 오랜만에 오르게 된 산 덕분에 볼 수 있던 지금의 풍경. 앙상해진 은행나무 너머로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는 구름. 그리고 그 모습을 잠잠히 지켜보는 나. 그들이 만들어낸 모습은 나에게 있어 말없이 모든 것을 잊기에 많이 모자랐다. 랄까.
아무튼 그날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