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도 아닌, 꽃 피는 봄도 아닌 애매한 지금의 2월. 그날의 순천은 눈이 내렸다.
열기 따윈 하나 없는 냉랭한 공간 사이로 얼어버린 습기의 조각들이 인생의 부스러기마냥 떠다니고 있다. 대나무처럼 곧은 심지랄까? 이전에 했던 나와의 모든 약속은 가뿐히 저버리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1시쯤 포근한 전기장판에서 기어 나와 침대 머리맡 즈음 조신하게 놓여 있는 슬리퍼 위로 육중한 나의 발 끼얹고서, 늦은 점심 준비를 하기 위해 1미터 남짓 머물러 있는 의자를 향해 스르륵 걷는다.
목덜미로 스며드는 시원한 냉기 덕분에 쇠골에 힘을 잔뜩 주어 양어깨를 한껏 웅크려본다. 그 덕에 숙어진 고개, 시선 끝자락 즈음에 양껏 화가 나 있는 무언가가, 차마 두 눈 멀쩡히 뜨고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민망스러운 그것이, 육중하게 부풀어 있는, 복어의 양 볼보다 더욱더 커다랗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아 보이는, 볼품없이 듬직한 나의 복부가 머물러 있다. 하아.
월 3만 원인가? 에 렌탈한 직수 정수기에서 콸콸거리며 쏟아지는 맑은 물을 커피포트에 때려 부으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습관처럼. 의미 없게도 짙게 발려진 시트지 덕분에 바깥세상은 1도 보이지 않는다.
허나 침대에서 일어나기 딱 좋은, 이 시간 즈음 떨어지는 햇살 덕에 푸르른 시트지 너머로 코발트 빛 푸르름이 은근하게 내 공간까지 스며들어 오는 것 같기도 하다.
코를 통해 빨려 들어온 공기가 목구멍을 지나 자연스럽게 양 허파로 스며드는 것처럼, 서스럼 없이 커피포트에 전원을 켜고서 눈 깜짝할 순간에 듬직한 몸뚱이를 들어 책상을 뛰어넘는다. 여기저기 갈라져 있는 가죽 의자를 비껴 칠 듯 즈려 밟고서 쏜살같은 속도로 맞은편 선반에 다가가 있는 힘껏 창문을 열어젖힌다.
눈이다.
눈이 내린다.
모래시계 속 모래 알갱이들이 중력에 이끌리어 바닥으로 떨어지듯, 하늘에서
뿌려지는 깨끗한 똥 덩어리 같은 아름다운 눈들이 세상에 내려앉으며 들릴 듯 말 듯 잔잔한 음악을 아스팔트 위로 새기기 시작한다. 불어오는 바람의 손놀림에 얼음 알갱이들은 이끌리듯 발맞추고 차분하게 부서진다. 때로는 희미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커피 한 모금 입안 가득 채워 본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날수록. 내 젊음의 나날들이 하나둘 지워져 갈수록 두려움은 커져만 가고, 남아있는 내 젊음의 시간이 점차 기울어져 갈수록 두려움은 어둠보다 더욱더 검게 짙어져 간다.
인생이라는 무거운 단어 앞에서 애를 쓰려 하지만, 나약한 파도 한방에도 아주 쉽게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내 인생도 눈보라에 실려 저 멀리 휩쓸려간다.
누구보다 뜨거웠을 누군가의 젊음이, 눈물들이, 노력이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까 봐, 피어나지 못하는 꽃이 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
뜨뜻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머그잔을 손에 들고 일렁이는 검은 물 한 모금 벌컥 들이킨다. 눈부시게 쨍한 햇살 한줄기 저며 들었는지, 아니면 시린 눈물방울 녹아들었는지 오늘따라 커피 맛이 별로다. 혓바닥 위로 굴러다니는 커피의 알갱이들이 시큼하게 그지없다.
쩝.
누가 그러더라.
봄이 오면, 빼앗긴 들에도 왔던 그 완연한 봄이 오면.
꽃은 핀다더라.
꽃이기에 핀다더라.
꼭 피어난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