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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쥰세이 Oct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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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자 2와 4 사이에 3이 있다. 3을 삶과 같이 읽는 이유를 빌어 사는 곳을 옮기는 건, 이와 사 가운데에서 살아온 ‘삶’을 마주하는 일로 여겨본다. 



  다락문을 열었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경첩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 피우는 소리를 낸다. 짧은 사다리처럼 놓인 나무 계단 세 개를 올라 다락 입구에 앉았다. 냄새가 난다. 다락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 살아가며 종종 시간의 냄새를 맡곤 한다. 다락에서 맡은 냄새는 지난 시간이 짙게 배어있는 내음이다. 급하게 이사를 오면서 엄마는 당장 사용하지 않더라도 버리기에 내키지 않는 물건들을 모두 다락에 넣어 두었다. 사기그릇을 싸놓았던 스포츠 신문에 탤런트 성동일 씨 기사가 실려있다. PCS 019 광고 출연료로 사천만 원을 받은 기사였다. 웃고 있는 청년 성동일 씨 모습이 낯설다. 다락의 시간은 천구백구십구 년 세기말에서 그치었다. 우리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서 새천년을 맞이했던 순간, 나무문 하나를 두고 지난 세기에 멈추어 서 있었다.



  엄마와 달리 물건들을 정리하며 이삿짐을 싸는 과정이 더디어지는지는 까닭은 회상에 있다. 언제가 봤을 법만 한 책 사이에 끼워져 있는 편지를 읽으면 의식은 편지에 쓰여 있는 문장을 따라가다 그때쯤의 볕과 자주 입던 옷을 입고 함께했던 이들을 떠올린다. 이런 식으로 짐 정리하다 보니 종일 매달려도 진도가 빠르게 나아가지 못한다. 사진 앨범이 나오면 앨범 속 사진 장수만큼 시간이 지나있다. 하나같이 벨벳으로 커버를 감싼 것만 같은 올드한 사진 앨범 사이에서 그나마 꽤 세련된 커버를 씌운 앨범이 있었다. 파스텔 색조의 하늘색 바탕에 작은 눈을 뜨고 반짝이는 별들이 그려진 아기 앨범이었다. 두꺼운 앨범 커버를 넘겼다. 내가 본 건, 못 본 지 오래되어 잊고 있었지만 잃지 않은 것이었다. ‘나에게도 있었겠지… 나를 괴롭히는 생각과 감정에 불안해하는 일 따위는 없던…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 사진 속 아이는 슬픈 표정을 하고 있지도 울고 있지도 않지만 유년기 사진을 보는 내 눈에 눈물이 차 번져 보인다. 만약, 사진 속 유치원 등원복을 입은 아이를 꿈결에라도 만나게 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네가 감당하기 어렵고 힘겨운 일들이 많을 거야. 어렵고 힘든 일이지 극복 못 할 일은 아니야.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결국 지나가고 그 시간을 견디는 힘은 네 안에 있단다. 너는 축복받고 행운이 따르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 전부 내려놓기에는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줘. 엄마가 그랬는데 축복 속에서 태어나 행복과 웃음 속에서 자랐어. 당장은 모를 테지만 언젠가는 분명 알게 될 거야 다락방 속 앨범 속에서. 홀로 먹는 늦은 저녁 냉장고에 채워진 반찬 속에서. 늦게 들어오는 밤 네 방에 틀어진 전기장판에서. 네가 여러 말로 아프게 한 사람에게서. 그럼에도 너를 걱정해 주는 그 사람의 문자 메시지 속에서. 개어져 있는 네 빨래 속에서. 내내 건강해.’



  이삿날 아침 일곱 시 오십 분,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왔다.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온 그들은 우리에게 신발을 신어달라고 말했다. 이십 년을 살아왔고 그들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맨발로 서 있었던 우리의 보금자리가 한순간에 떠나가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교수님과 학우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못 한 채 답안지 제출과 동시에 졸업해 버리는 대학 마지막 기말고사 날처럼 서운하다. 현관문을 꽉 채울만한 체형의 몽골인들이 짐을 빼기 시작했다. 성인의 나이가 되어서 처음 겪는 일에 나는 멀뚱히 서 있다. 그들은 별일 아닌 표정의 치과의사처럼 긴 시간 같은 곳에 있던 가구들을 빼갔다. 제자리를 디디고 있던 가구들이 빠진 장판에는 먼지가 눌어붙은 세월이 깊이 주름져 있다. 


  내 방의 서랍장과 책상이 나가고 텅 비어버린 방에서 창이 눈에 들어왔다. 내 방 창이 이리 컸었나 싶다. 방에 남아 있는 건 창뿐이었다. 비어 있는 방에 커다란 눈 같았다. 내 눈은 방의 눈을 마주한다. 주변 건물과 주택이 가로막아 볕이 들지 않는 창이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무렵이면 근처에 세워진 빌라들 사이 절묘한 틈으로 드는 볕에 잠시나마 얼굴을 대고 볕을 쬐던 창이었다. 좁은 틈 사이로 찔러 넣어주는 편지 같은 볕이었다. 무언가에 답답해질 때면 많은 한숨을 내쉬던 창을 매만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벌게진 눈으로 본 창밖은 어제같이 알맞게 서늘한 사월의 아침이었다. 창문 앞 나와는 사뭇 다른 무심한 창밖 모습이었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선다. 집을 나와 차에 올랐다.



  2와 4 사이에 3이 있다. 3을 삶과 같이 읽는 이유를 빌어 사는 곳을 다른 데로 옮기는 건 이와 사 가운데에서 살아온 ‘삶’을 마주하는 일로 다가왔다. 싸가는 이삿짐 사이에서 지난 삶을 봤던 나는 풀어가는 이삿짐 사이에서 새 삶을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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