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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 중간 어디쯤 Mar 04. 2020

뭉클한 찜닭통

코로나 19 이후 마트에 가는 것도 무섭다.


마트에 가는 것이 무섭다는 핑계로 저녁 메인 반찬을 위해 찜닭을 시켰다. 하얀 일회용기에 담겨온, 당면에 감겨 있는 찜닭 덕에 온 가족이 배부르게 잘 먹었다.


저녁을 담당해 준 찜닭을 담아 온, 그러나 이제 임무를 다한 하얀 일회 용기는 그날 저녁 쓱쓱 대강 씻은  뒤 베란다에 있는 재활용 통에 버렸다.


그리고 잊었다.

잘 시간이 다 되어 아이가 요리사가 되겠다고 우기전까지는.


자기 전 책 한 권을 읽은 뒤

갑자기 4살 둘째가 책 속에 있는 요리사로 변신시켜 달라고 한다. 6살 형은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슈퍼영웅'이 되었고

둘째는 무조건 요리사가 되어야 한다고 우긴다.

요구사항은 앞치마와 요리 모자.


앞치마는 남아 있던 빨간 보자기로 해결했지만

모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 되었다.


그때, 둘째가 "식탁에 모자 있잖아요"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결국 아이와 함께 방에서 부엌으로 나왔다.


"없어졌네"라고 말한 뒤 집 곳곳을 뒤지던 아이가 드디어 찾아 쓰고 온 모자는 찜닭 담았던 흰색 플라스틱 통이었다.


활짝 웃고 있는 아이의 모자를 급한 마음에 낚아챈뒤

일단 깨끗이 씻고 닦아 다시 씌워주었다.

휴~ 다행이다.

오늘은 울리지 않고 재울 수 있겠다.

그런데.. 이게  모자지?


그런데 신기하다.

제법 잘 어울린다.

4살 꿈을 이뤄준 게 뿌듯한 듯 더 하얗게 빛나는 찜닭 통, 아니 모자^^


둘째야, 너의 시선은

이걸 모자로 만드는구나.

문득 모자  보아뱀을 알아봐준 어린 왕자가 생각났다.


그 뒤에도 몇 날 며칠을 요리사가 되겠다던 아이 때문에

찜닭 통을 버리지 못해 귤 담는 그릇으로 사용했다.


모자도 되었다, 귤 담는 그릇으로도 변신하는 찜닭 통을 예상하지 못하게 매일 보게 되니

괜히 감정 이입이 되어서  온갖 생각이 났다


'저 통은 공장에서 나올 때 모자가 될 걸 예상이나 했을까?'

'찜닭 담을 때 행복할까, 귤 담을 때 더 행복할까?'

'뜨거운 찜닭을 견뎌낸뒤 버려질 때는 기분이 어땠을까?'

'다 견뎌내니 모자가 되는 날도 오네'

인생의 중반까지 온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며칠이 지났을까.

"엄마 쉬 마려워요~"

아무리 찾아도 평소 쓰던 소변통이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내 눈에 들어 온건 식탁에 있던 귤을 담고 있던 통이었다.


모자였던 찜닭 통은 그날 소변통이 되었고

차마 더 이상 모자로 쓸 수는 없어

버렸다.


두 번째 버림이었지만

버릴 때의 마음은 첫번째와 달랐다.

그 찜닭 통에게 뭉클한 마음이 생겼다.

뭉클함 속에는 고마운 마음이 제일 크게 자리 잡았던것 같다.


다른 시선으로 찜닭 통을 알아봐 준 어린 왕자 둘째 덕에  코로나 19가 무섭던 어느 날, 찜닭 통과의 추억을 만들었다.


어린왕자 덕에 바뀐것은

찜닭통 만은 아니리라.


여태껏 자신만을 알아오던 나를 '엄마'로 만들어 주었고

어린왕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게 만들었다.


모든 인생이 소변통은 아닐테지.

아니, 빛나는 모자였다가 그릇이었다가 소변통이었다가 찜닭통이기도 한 것이겠지.


나의 어린왕자야

찜닭통에만 머물지 말고 모자를 꿈꾸어 주렴.

소변통이 되더라도 모자였던 찜닭통이었음을 가슴에 품어 주렴.

엄마는 그런 너의 모든 모습을 사랑할게.

그리고 말야, 엄마의 지금 모습도 조금 더 사랑해 주기로 마음 먹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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