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살 나이에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총각 따라 시집온 아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1990년 12월 9일 결혼식 날은 아침에 임업시험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유일한 추억이다. 하객 식사대접을 전주비빔밥으로 정하셨던 아버지의 결정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첫날부터 "미안하지만 맞벌이를 해서 내가 진 빚부터 갚아줘요~"라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속아서 빈털터리와 결혼한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철없이 멋모르고 결혼한 아내는 실망감이 가득했으리라. 요즘 같이 조건을 따지는 시대라면 절대 성립할 수 없는 결혼이었다. 습하고 열악한 반지하 신혼집에는 좀도둑도 들어왔고, 마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송강호의 동네를 방불케 했다.
아내는 결혼을 물리라는 장모님의 노함을 무던히도 참고 견디며, 자신도 출근하랴 바쁜 와중에 아침 밥상까지 챙겨주면서 신랑의 무거운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아내는, 자기가 결혼도 못할 나를 구제해 줬다며 으스대기도 한다. 그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다.
신혼여행도 돈 아끼려 본사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였다. 맞벌이하느라 첫아들도 결혼 3년 후에야 태어났다. 아내는 자기 수입으로 내가 진 전세빚을 갚아 주었고, 나는 외국인 상사에게 꾼 결혼자금을 3년 만에 갚았다.
복덩이 아내 덕분에 조금씩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면서 살던 와중에, 총각 때부터 넣어놓은 청약통장으로 9번째 도전한 분당지역에 막차로 당첨되어, 빚내어 중도금 갚아가면서 결혼 4년 만에 내 집을 장만하였다.
살던 집을 팔아서 큰 평수 전셋집으로 옮겨 애들 교육시키고, 해외주재원으로 나갈 때는 그 전세금을 빼어서 다시 전세 낀 집을 사놓고 출국하여 미래를 내다본 현명함도 아내의 지혜였다.
회사 다닐 때 조직 내 갈등으로 여러 번 사직서 내려던 것을 만류시켜 결국 최장기 근무자로 눌러 앉힌 것도 아내였고, 생각보다 이른 퇴직을 가장 슬퍼한 것도, 또 새 출발을 격려해 준 것도 아내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어진 아내는 맑은 가을하늘 같이 한결같았다. 어떤 일이 닥쳐도, 엉덩이가 가벼운 나보다 더 태산 같은 묵직함으로 꿈쩍하지 않았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어버이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아내였다.
나는 숫자 9를 좋아한다. 1990년 9월에 만나 9월 9일에 바로 청혼하여, 12월 9일에 결혼했고, 9번 도전에 집 장만 등등... 9와 얽힌 즐거운 추억이 많다.
아내는 나를 만나기 전 첫 해외출장지에서 그 나라를 상징하는 광고 간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우연히도 내가 다니던 회사였으니 이것이 천생연분임을 암시하는 계시였을까?
여보 고마워요. 우리 99세까지는 건강히 살면서 서로 아껴주고 사랑합시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