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한국인

IMF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

by 생각여행자

한창 외모에 눈을 뜨던 시절 독일 친구들과 쇼핑을 하면 꼭 들르는 브랜드 상점이 있었다. 동네에서 꽤나 힙하다는 아이들은 그 브랜드에서 옷을 사 입었고 나도 용돈을 모아 흰색 골덴 나팔바지를 사 입겠다 다짐했다. 한창 꾸미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내 용돈을 반액도 아닌 1/3로 줄여야 한다는 부모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결정을 듣게 됐다. 흰 골덴바지를 꼭 사겠노라는 계획은 좌초되었고 나는 일주일간 부모님과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사춘기 시절의 철없는 첫 파국을 맞이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 파국은 감히 파국이라 말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일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생활할 동안 난 한국에 있는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늘 즐거운 소식을 전달해 주는 친구의 편지를 기다렸는데, 어떤 편지만큼은 슬픔에 가득 차 있었다. 친구는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했다고 했다.


나라가 어려워졌다고, 너무 무섭다고…….


그 당시 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구 반 바퀴 뒤의 일이기에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곧 알게 됐다.

한국에서 아무리 멀리 떠나와 있었어도 우리 가족은 IMF 외환위기에 따른 타격을 완벽하게 피해 갈 순 없었다. 나는 한국에 거주하던 내 또래의 아이들이 경험한 IMF사태를 다른 형태로 경험했다.



한국인이 사라졌다


언제부터인지 한인학교에서 점차 친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언제나 북적대고 활기찼던 학교의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하교를 기다리는 학부모님들의 낯빛도 어두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바이올린 레슨이 중단됐다. 유학생이던 선생님은 급히 유학을 접고 귀국해야 한다고 하셨다. 호탕했던 아버지의 친구는 한국에 사둔 집을 처분하러 한국으로 급히 떠나셨다. 가까이 살던 한국인 이웃도 떠났다. 매주 한인학교 친구들이 작별인사를 했고, 나와 몇 안 되는 학생들만이 남아 반이 하나로 통합돼 수업이 이어졌다. 귀국하지 않고 독일 이민을 급작스레 결정하게 된 친구도 있었다. 이 모든 결정은 너무도 쉽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타지 생활의 위안을 주었던 한인학교엔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독일에 거주하던 한국인의 삶도 IMF 사태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아버지는 독일지사에 남게 됐다. 나는 막연히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으로 우리도 한국에 가면 안 되는 것인지 물었지만 남게 된 것이 다행이며 이 편이 안전하다 했다. 아버지는 매일 야근을 했고 토요일에도 사무실에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아버지의 실제 근무시간은 독일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여행은 물론이고 주말을 여유롭게 보내는 것도 사치였다. 우리의 삶도 언제 180도 바뀌게 될지 모르는 초조한 날들이 이어졌다.


독일학교의 분위기는 주말 한인학교의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한동안 나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래서 한국의 상황을 알 턱이 없었던 독일 친구들의 평온한 삶에 도저히 섞여들 수 없었다. 침울한 나날을 보냈던 내게 친구들은 이유를 물었지만 나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IMF 사태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라가 망할 것 같다고, 그래서 한국인이 마을에서 사라졌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전 18화이방인이 보이는 집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