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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우화

"역사가 낳은 역설의 희생자"

by 백창인 Jun 18. 2017

1. 용왕이 병에 걸렸다. 토끼의 간으로만 나을 수 있는 희귀병이었다. 모두가 말을 꺼리는 가운데 충성심 강한 노신(老臣) 거북이가 토끼의 간을 구해오겠노라 나섰다.


2. 육지에 올라온 거북이는 토끼를 만나자마자 무턱대고 간을 요구했다. 토끼는 어이가 없었지만 천성이 도박꾼인지라, 자신의 간과 거북이의 등껍질을 걸고 달리기 경주를 제안했다. 토끼의 달리기 실력을 몰랐던 거북이는 덜컥 제안을 수락해버렸다.


3.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시작했다. 토끼는 자신의 실력에 자만한 나머지 산 중턱에서 잠을 청했다. 거북이는 꾸준히 한 걸음씩 내디뎌 마침내 자고 있는 토끼를 앞질렀다. 토끼가 깼을 때는 이미 거북이가 결승선을 통과한 뒤였다.


4. 분한 토끼는 자신의 스승인 아킬레스를 데리고 왔다. 거북이가 아킬레스까지 이긴다면 간은 물론이요 오장육부를 모두 주겠다며 꼬드겼다. 제자 토끼가 얼마나 빠른지 직접 확인한 거북이는 스승과의 경주가 겁났다. 그러자 지나가던 수학자 제논 왈, "거북이가 100m 앞에서 시작한다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럴듯한 논리에 설득당한 거북이는 100m 앞에서 시작하는 조건으로 경주를 승낙했고, 보기 좋게 지고 말았다.


5. 등껍질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거북이는 자신의 나이를 내세우며 항변했다. 어디 자식뻘도 안 되는 것들이 늙은이를 죽이는 데 부끄럼이 없냐며, 이 육지에 노인 공경이라는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가! 그러자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불현듯 나타나 물었다. "당신이 아주 빠른 속도로 미래를 여행한다면 당신의 자식이 당신보다 나이가 많을 것입니다. 그럼 누가 누구를 공경해야 합니까? 공경은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6. 말문이 막힌 거북이는 토끼에게 등껍질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 거북이는 역사가 낳은 역설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가 침을 튀기며 자랑했던 나이가 그를 죽이고 만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인슈타인은 거북이만큼 오래 살지 못해 그를 이해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하이젠베르크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그의 말년은 필연적으로 거북이를 떠올리게 한다. 거북이는 죽었지만 그의 혼령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에까지 스며든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누구를 공경해야 하는가?


16.11.10. 씀

17.06.18.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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