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의 의무는 납세, 교육, 근로의 의무와 같이 국민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신성한 의무이다. 그런데 국민의 4대 의무 중 유독 병역의 의무만은 이상하게 남자에게만 부과하고 있으니 평등의 법 정신에 어긋난 것이다. 국민의 4대 의무가 위헌의 소지가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왜 여자는 병역의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보다 더 이상한 일은 그 이상한 불공정 관행에 대해서 왜 우리 사회는, 남자들은 지금까지 이를 용납하여 온 것인가? 생각건대 남성의 완력이 주요 생활수단이었던 고대사회에서 수렵, 농경, 전투행위를 남자가 도맡아 오던 우월의식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까닭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지금은 완력의 시대가 아니라 인지력의 시대이다. 남자의 완력은 현대 기계문명이 대신하게 되었고, 현대 기계문명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적인 인지력이다. 그 인지력에 있어서는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으며 어떤 면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성이 남성을 능가하는 부분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의 운동 경기력은 남자를 훨씬 능가한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남성우월주의가 살아있고, 남성만이 병역의 의무를 지고 있는 관행이 아직까지 사회에서 용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성이 가지고 있었던 우월의 격차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남성의 실속 없는 우월의식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에는 완력과 인지력 모두 여성에 앞섰으나 지금은 인지력에서 우위를 잃어버려 완력만으로는 남성의 우월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현대전에서는 병역의무가 완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세상이다. 남자만이 병역의 의무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남성이 병역의무를 전담하는 것은 여성과의 사회경쟁에서 치명적이다. 남자의 병역의무 기간에도 여성은 멈추지 않고 계속 사회적 능력을 키워나가는데 남자는 병역의무기간에는 흐르는 강물에서 젓지 않는 배처럼 뒤로 밀려나는 일이 더 많다. 여자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군대 간 남자는 뒤로 밀려난다면 그 격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근래 여성의 활동이 늘어가고, 공무원도 여성이 점점 수적인 우위를 보이고, 신규교사는 거의가 여교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의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남성의 병역의무가 발목을 잡은 결과가 더 크다. 막말로 여자는 한참 공부할 때에 남자는 군대 가서 목숨 내놓고 딴짓하고 있는 것이다. 병역의무 기간에 잃어버린 남자의 젊은 시절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생의 황금기이다. 그런데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금쪽같은 청춘과 가치가 철저히 무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관행대로 나약한 여성을 지키는 기사도 정신을 내세우거나 국토를 도맡아 수호하려는 기개는 남자의 주제넘은 허세요, 몰지각이 아닐까?
병역의무 이행자가 희생하는 황금기는 단순한 2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매겨주어야 한다. 아무리 봉급을 올려주고, 군 복지를 향상한다 해도 그 청춘을 보상할 수는 없다. 병역의무 기간 동안 벌어진 여성과의 격차는 평생 동안 노력해도 극복하지 못할 넘사벽이다. 병역의무를 신체 건강하게 마치기도 쉽지 않다. 심한 경우는 전사, 불구가 되는 경우도 있고, 지병을 얻거나 영창을 가는 수도 있다. 이 모든 불행이 병역의무 때문이라면 오로지 민족과 국가를 위한 희생이 분명하다. 직업군인이 아니고, 병역이 의무가 아니라면 군대에 스스로 좋아 갈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병역의무 동안 입는 정신적인 피해는 더 크다. 군대는 매우 특수한 집단인데 조직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철저하게 강요한다. 군대라는 조직의 생리는 철저한 현실주의요, 실리주의요, 임시방편, 임기응변을 강요한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다가는 잠시도 배겨나기 어려운 것이 군대의 조직생리이다. 이렇게 2년을 살다보면 그 군대생리가 몸에 배기 마련이고, 이 습성은 사회에 나와서도 치유되기 어려운 병이 된다. 군대 가서 사람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사회에서 비정상이었던 사람의 드문 경우일 뿐, 다분히 역설적인 말이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는 군대에서 비롯된 것이 많고, 이것이 이른바 군사문화라는 것이다. 군사문화는 민주시민사회 문화와는 매우 이질적이다. 인생의 황금시기에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큰 희생이다. 반민주적인, 비인간적인 조직에서 장기간 받는 스트레스는 평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악몽이 된다. 병역 이행자가 꾸는 악몽 중에 가장 끔찍한 악몽이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꿈이요, 말년에 제대특명이 안 내려오는 꿈이다. 군대에 가 보지 않은 여성이나 병역의 의무를 기술껏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신적 상처이다. 그러나 그 끔찍한 희생에 대하여 국가 사회가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데 대한 상실감, 배반감은 또 다른 상처이다. 물론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의로운 젊은이도 많지만 목숨과 황금시대를 바친 결과가 보상은커녕 불리해진 조건에서 병역미필자와 여성에게 경쟁에서 밀려났을 때 겪는 좌절감은 내 몸 바친 이 사회가 매우 불공정한 사회라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물론 병역의무를 이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딱한 젊은이도 있지만 병역의무를 영예로 알기는커녕 몸서리치는 후회로 발등을 찍고 싶어 하는 젊은이가 많다. 드물게는 군에서 사지가 절단되어 찍을 발등마저 없게 만든 이 나라와 사회는 가혹한 배반자가 틀림없다.
국가와 사회에서는 이들의 희생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을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의 금쪽같은 아들이요, 형제이다. 아무리 같은 자식이라지만 아무런 의무도 하지 않은 자식과 부모를 위해 신명을 바친 자식을 똑 같이 대한다면 공정한 부모가 아닐 것이다. 열 손가락 물어 안 아픈 손가락도 없지만 손가락 중에는 없어서는 안 될 엄지도 있고, 이름조차 없는 무명지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공무원 채용 시에 군 가산점 수제를 추진해 왔으나 여성부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반대의 명분은 남녀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이지만 병역의무에는 애초부터 남녀평등은 없었다. 입대 시에는 불평등이었는데 제대 후에는 평등이라니 이런 불공정한 역차별이 어디 있는가? 말로만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사탕발림하지 말고 ‘속은 국방의 의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염치이다.
공무원뿐만 아니라 병역을 마친 젊은이에게는 사회진출 시에 어느 정도의 우대를 해 주어야 건전한 국가관과 애국심을 북돋아 줄 수 있다. 그것은 남녀차별이 아니라 공정한 대우요, 희생에 대한 정당한 대가요, 사회의 보답이다. 실제로 그런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가 적지 않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도 있었지만 미국의 공동묘지 묘비에는 참전 기록을 가장 명예롭게 새겨놓았다. 그것은 병역의무 이행자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보답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실한 병역의무자에 대한 보답은커녕 전역 후에도 예비군 동원훈련에 시달려야 하니 이런 불평등이 없다.
남자의 편에서 말하다 보니 여성, 특히 위대한 엄마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 같다. 요즈음 같이 워킹맘들이 많다 보면 이 땅의 엄마들의 희생이야 병역의 의무에 못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병역의무자의 불만은 병역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무에 대한 대가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병역의무자의 불만은 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병역의무를 고의적으로 기피하는 남성에 있다.
죄의 종류를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중에는 양심범이란 것도 있다. 양심을 가지고 죄를 지을 수 있다면 죄의 규정과 판결도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 만든 법으로는 신이 만든 心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그러나적어도 병역 거부자들에게는 양심범이란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총을 들고 나라를 위해서 나선 이는 양심적인 국민이지만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방의 의무를 저버린 이기주의자이다. 그들은 사회를 지킬 의무를 거부하였으므로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도 없어야 옳다. 그런데 이들의 반사회적인 이기주의를 양심이라고 하여 보호한다면 이 사회는 참으로 양심 없는 사회이다.
누구도 병역의 의무를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다. 병역의무를 지키는 사람은 국가를 위해서 기꺼이 개인을 희생한 양심으로 가득 찬 젊은이들이다. 2년의 군 복무가 얼마나 쓰라린 희생인지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모른다. 권력과 술책으로 교묘하게 병역의 의무를 기피, 회피하는 권력층들에게는 병역의무가 못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빽도, 돈도, 권력도 능력이라고 공언하는 양심 없는 세상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양심이란 말을 이런 뻔뻔스러운 이기주의자들에게도 붙여준다면 청춘을 희생하며 목숨을 걸고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대부분의 선량한 애국자는 양심불량자가 될 판이다. 그러한 부당한 제도를 만드는 국회의원들도 양심 의원이고, 그런 판결을 하는 법관들도 양심 법관인가? 이러한 양심이라면 인권도, 인도주의도, 민주주의도, 반전주의도, 비폭력주의도 양심적이지 않다. 이래저래 지금은 양심의 수난시대이다. 그래서 양심선언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가 보다.
이기주의자인 병역 거부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거나 간교한 병역회피자들을 합법화하는 법원은 양심적인 병역의무자들을 허탈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범자나 살인자로 모독하는 짓이 아닐까? 병역 기피자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병역 의무자에 대한 무대접은 이 나라가 공정하지 못한 비양심적 사회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은 병역의무 이행자에 대한 조국의 가혹한 배반이다. 의로운 이 땅의 젊은 남자를 매몰차게 내치면서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에게는 인권존중을 내세우는 사회는 양심 없는 배반자이다.
蛇足
또 하나의 '조국의 배반'이 있다. 祖國이 젊은이를 배반했듯이 조국은 문대통령을 배반했다. 젊은이를 배반한 조국은 어리숙해서였지만 대통령을 배반한 曺國은 탐욕스러워서였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면 안 될 일이다. 백보 양보해서 남들이 다 그러니 나도 그랬다면 남보다 잘 난 것이 없으니 남들처럼 가만히 있어야 했다. 개혁은 아무나 하는 개가죽이 아니라 남의 수범이 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도 못한 주제에 나라를 개혁하려고 했다면 엉뚱한 탐욕일 수밖에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인물에게 국가대사를 맡긴 대통령은 무능일 수밖에 없다. 그 탐욕과 무능 때문에 현 정부와 진보세력은 치명상을 입었다.
제갈량이 총애하던 부하 마속에게 중대 임무를 맡겼지만 마속의 공명심 때문에 초나라는 북벌을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면서 마속을 처형했다는 것이 읍참마속(泣斬馬謖)이다. 그런 결단력과 정치적인 혜안이 있었기 때문에 초나라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아직도 조국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제갈량 같은 정치적인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호미로 막을 때 가래로 막으라고 했다. 썩어가는 손가락을 아끼다가 손을 잃는 것이 석지실장(惜指失掌)이다. 조국과 정권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일의 경중을 모르는 것이다. 조국이 양식이 있었고, 대통령이 지혜가 있었더라면 우리의 장래가 달라질 것을- 조국이 온통 배반의 시대라 그런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