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헌디?

세상사에는 선 후 경 중이 있다.

by 김성수

한때 ‘뭣이 중헌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지나가는 유행어가 아니라 대를 물려가며 새겨야 할 교훈이다. 세상사 그 많은 일을 다 챙길 수는 없으니 일의 先後선후와 輕重경중을 따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이치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이 비록 사투리로 한 때의 유행어에 불과했지만 '物有本末물유본말'이라고 하는 거룩한 성현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그 뜻은 세상만사에는 근본이 있고, 부수적인 것이 있으니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다. 똑같은 말을 공자는 점잖게 말씀하셨고, 우리는 ‘뭣이 중헌디?’라는 속된 말로 표현했을 뿐이다. 같은 뜻이면서도 더 점잖지 못한 말은 ‘똥 오줌 못 가린다’이다. 하는 짓이 기저귀 차고 다니는 어린애 같다는 말이다. 점잖게 物有本末이라면 긴장하고, ‘뭣이 중헌디?’라고 하면 우습게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똥 오줌도 못 가리는 짓이다.


朝三暮四조삼모사라는 말이 있다.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이 도토리가 모자라 사료를 하루 7개로 줄여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원숭이에게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원숭이들이 화를 내고 야단이었다.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좋아했다. 아무래도 결국은 7개였지만 우선 4개라는 말에 뒤에 3개는 생각지 못했으니 점잖게 말하면 일의 본말을 모른 것이고, 속된 말로 하면 뭣이 중헌디를 모른 것이고, 막말로 하면 똥 오줌을 못 가린 짓이다.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비웃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특히 선거철이면 무수한 기생충들이 유권자를 원숭이 취급한다. 똑똑한 척 하지만 기생충을 뽑는 순간 국민은 언제나 원숭이를 면치 못한다.

買櫝還珠매독환주라는 성어도 있다. 보석을 사는 사람이 보석을 포장한 상자가 하도 예뻐서 상자만 챙기고 보석은 도로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어리석음을 바보라고 비웃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또한 드물다.


鄭人買履정인매리라는 성어도 있다. 우리나라에 충청도 사람이 있듯이 중국에는 어리숙한 정나라 사람이 있다. 신발을 사러 장에 갔는데 장에 다 가서 생각하니 신발 크기를 재오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집에 돌아와 신발 크기를 재서 다시 장에 갔더니 이미 파장이더라는 이야기이다. 직접 신발을 신어보면 되는 일을 가지고 구태여 신발 칫수를 재려고 했으니 역시 큰 바보이다. 모두들 자신 있게 정나라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웃겠지만 자신의 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발 얘기하는 김에- 削足適履삭족적리라는 성어도 있다. 나막신을 샀는데 작아서 발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발을 바꾸면 되는 일이지만 그 대신에 자신의 발을 깎아서 나막신에 맞추려고 했으니 그냥 바보라고 하기에는 너무 웃픈 이야기이다. 옛날 이야기이지만 알고 보면 현명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거기에서 멀지 않다.

요즈음 사람들은 한자를 어려워 하니 속된 말 ‘뭣이 중헌디?’를 가지고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우리한테 정말 중헌 것은 무엇일까? 물질적인 여유와 편리한 세상일까, 정신적인 여유와 인정이 넘치는 사회일까? 나의 자유와 행복만을 위해서 사는 것일까, 사회의 질서와 공익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일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웃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일까, 양심을 지켜가며 자신의 능력에 맞게 사는 것일까? 내 한 몸 무병장수가 인생의 목표여야 할까, 그보다는 내 본분과 역할을 해 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여야 할까?

둘을 다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부득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뭣이 중헌가? 똥 오줌이 아니라서 가리기 어려운가? 자신의 판단이 어렵다면 자식과 후손에게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우선 도토리 4개를 챙겨 두라고 해야할까? 보석을 담은 상자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혔다고 가르쳐야 할까? 사실 정나라 사람뿐 아니라 현대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어쩌면 신발을 바꾸느니 나를 바꾸는 것이 쉬운 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회가 잘못되거나 말거나 나만 출세해서 편안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고 가르칠 것인가?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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