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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May 04. 2020

딱 일주일만 기다렸다가 민들레를 뽑았더니

그 시간 동안 자란 건 민들레 뿐만이 아니라 아이의 생각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부사는 민들레와 같다. 잔디밭에 한 포기가 돋아나면 제법 예쁘고 독특해 보인다. 그러나 이때 곧바로 뽑아버리지 않으면 이튿날엔 다섯포기가 돋아나고..  그 다음날엔 50포기가 돋아나고.. 그러다 보면 여러분의 잔디밭은 철저하게(totally), 완벽하게(completely), 어지럽게(profilgately) 민들레로 뒤덮이고 만다. 그때쯤이면 그 모두가 실제 그대로 흔해빠진 잡초로 보일 뿐이지만 그때는 이미 - 으헉! - 늦어버린 것이다.
-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중


 
 폴란드는 민들레국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온 세상이 민들레천지다. 해마다 5월이면 하얀 민들레꽃씨가 하늘을 뒤덮어, 절정일 때는 운전하는데 시야확보가 어려울 정도다. (이건 뭐, 진눈깨비도 아니고...) 봄날씨가 상쾌하고 좋다고 창문을 열어두고 달리다간 자동차 시트에 하얗게 내려앉은 꽃씨깃털을 발견할 수 있다.
 작년 봄에는 외출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굳이 마당에 핀 민들레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없었다. 조금만 밖을 나가면 가로수길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게 민들레인지라 어느날 놀이터 가는 길엔 셋이서 민들레꽃씨를 50개쯤 꺾어 불기도 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마당에서만 봄을 즐기고 있는 상황. 그래서일까, 마당에 핀 풀꽃 하나도 꺾어버리기 아쉬워 그대로 두었더니 그야말로 - 으헉! - 상상을 초월하는 민들레밭이 생기고 말았다. 게다가 작년엔 매달 꼬박꼬박 오던 정원사도 올해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 아무래도 비수기인 겨울철에 폴란드를 떠나 다른 나라로 휴가를 떠났다가 코로나사태로 다시 입국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한다.




 지난 주에 저 민들레꽃밭을 정리하려다 아이들 반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제 막 하얀 꽃씨들이 생기려하는데, 그거 부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아까운 민들레꽃들을 꺾어버릴 수 없다는 거다. 사실 내가 처음에 마당에 한두송이 피었던 민들레꽃을 그냥 두었던 것도 같은 이유인지라... 아이들 마음이 이해되고 왠지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그대로 두었다. 아이들이 반대하는 일을 강행하려면, 아이들을 납득시키고 설득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잡초니까 뽑아야 한다.' 는 주장은 내 생각에 왠지 근거가 빈약했다. 평소에는 풀 한포기 마저도 모두 생명이니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던 엄마가 어느날 갑자기 돌변하여 잔인하게 민들레를 뿌리째 뽑아버리다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스티븐 킹의 책을 읽다가 하필이면 불필요한 부사를 민들레에 비유하는 바람에 저 구절을 읽으며 민들레를 어떻게든 처리해야한다는 욕망이 다시 차올랐다. 그래, 잡초는 잡초인거다. 저 민들레를 처리하지 않으면 마당은 민들레천지가 되고 말거야. 그 사이에 마당에 50송이 정도 피어있던 민들레는 개체수가 급격히 늘어 적어도 200송이, 아니아니 200포기는 되어보였다.  포기에서만도 대여섯 줄기씩 꽃송이가 올라오는 무서운 번식력이란!

잔디 속에서 슬그머니 노란 얼굴을 내미는 민들레

 문제는 아이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내 집이지만 아이들 집이기도 하고, 나보다 마당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아무래도 아이들이다. 가족들의 공용공간인 마당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문제에 아이들 의견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나, 아무래도 여전히 민들레를 좀 뽑아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운을 띄우며, 민들레가 뿌리가 너무 깊어서 잔디밭의 잔디들이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돌담이나 잔디밭이 아닌 곳의 민들레들은 그냥 둔다고 해도, 잔디밭은 우리가 일부러 씨를 뿌리고 잔디를 키우는 공간이니 이곳에 핀 민들레는 잡초다. 그대로 두면 민들레가 너무 자라서 마당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어차피 올해 민들레를 뽑아내도 얘는 워낙 생명력이 강해서 내년 봄에 또 잔뜩 피어날 거다. 등등... 일단은 내가  생각하는 이유들을 줄줄히 얘기하는데, 뭔가 잔인한 엄마로 비춰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구구절절히 말이 길어졌다. 그런데 덤덤히 듣던 아이들이 의외로 지난 주와 달리 순순히 오케이를 한다. 오늘은 민들레 뽑는 날이다! 하며 오히려 신난 듯 소리까지 치면서. 대신 돌담에 핀 민들레는 잔디를 방해하지 않으니 그냥 둬야하고, 크고 탐스럽게 핀 민들레는 아까우니 뽑아서 버리지 말고 자기들에게 달란다.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도 마당에 이젠 민들레가 너무 많아진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이 무심하고 아무 생각 없는 듯 보여도 나름대로 주변을 살피고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전리품, 뿌리째 뽑은 민들레

 덕분에 우리는 민들레의 뿌리가 얼마나 굵고 튼튼한지, 땅 깊숙히 박혀 있는지 그 면면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노란 꽃잎과 하얀 꽃씨만이 그동안 알고 있던 민들레의 전부였는데, 이렇게까지 민들레를 통째로 관찰해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속이 비어있고 빨대처럼 생긴 줄기로는 소꿉놀이도 하고, 아이들 부탁대로 제일 크고 탐스럽게 생긴 꽃들은 따로 모아두었더니 소담히 꽃을 담아 근사한 꽃병도 하나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걱정스레 한 마디 덧붙인다. 설마 꽃병에서 다시 씨앗이 날아가서 마당에 또 꽃이 피진 않겠지요?그러면 안되는데. 


나름 운치있는 민들레 화병이 완성되었다


 어깨가 뻐근해질 정도로 민들레꽃을 뽑고 또 뽑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비록 내가 뒤늦게 민들레꽃을 뽑느라 지난주보다 100포기쯤은 더 뽑아야 하는 수고를 하게 되었지만, 아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지난 주에 뽑지 않길 잘했다고. 싫다고 울상짓는 아이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지난 주에 잡초 뽑기를 강행했다면 아이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아이들과 똑같이 봄을 알리는 풀꽃을 반가워하며 소중하게 여겼던 엄마. 그리고 시간이 지나 너무 개체수가 늘어나서 뽑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엄마. 엄마가 양면적이고 이중적인 사람인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생각하고 다른 모습을 보인 것처럼 아이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잡초를 뽑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순간과 아이들이 그 필요성을 체감하는 순간에는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지만, 아이들은 걱정스레 마당을 쳐다보는 엄마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고, 잡초를 뽑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이 무르익자, 내가 우려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사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육아가 그렇지 않을까. 나도 어렸던 시절이 있기에, 그리고 더 많은 인생 경험이 있기에 사실 나는 아이보다 조금씩 앞서 필요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만큼 내 생각은 조금씩 앞서간다. 지금 내 아이에겐 이런 게 필요해. 이런 활동을 해야 해, 저런 공부를 해야 해. 하지만 이건 오직 엄마의 생각일 뿐 아이의 생각은 아직 거기에 미치지 않았다. 엄마의 속도와 아이의 속도는 엄연히 다르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무조건 엄마가 속도로 따라오라고 다그칠 수는 없는 일.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고,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삶을 채울 것인 지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아이의 몫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필요한 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렇기에 이 순간 좋은 엄마에게 필요한 건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다.

 사실 민들레 100포기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는데. 아차, 하는 순간이 지나서 으헉! 하는 순간이 곧 닥칠텐데. 하는 생각은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그냥 내가 말하는 대로 지금 잘 따라오기만 하면 돼. 그러면 잔디밭에 민들레가 너무 많아지기 전에 다 뽑을 수 있어. 그게 훨씬 더 쉬운 일인데 뭘 기다려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  그냥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 나중에 어른이 되서 생각하면 엄마가 옳았다는 걸 알게 될거야. 기다리는 것보다 사실 더 쉬운 건 이런 말들이 아닐까.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민들레를 뽑는 일이 오늘처럼 즐겁지 않았으리라. 노란 꽃을 질리도록 실컷 봤던 지난 일주일의 기쁨도 없었을 거고, 이렇게 많은 민들레로 다양한 놀이를 할 수도 없었을 터다. 기다림 끝에 찾아온 '맞춤한 때'에 아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풀을 뽑고, 누구보다도 즐겁게 일을 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잡초뽑기의 필요성을 순순히 납득하는 오늘의 이야기가, 그 일주일의 시간 동안 아이들이 무얼 보고 느끼며 생각이 어떻게 달라져가는지 면면히 관찰할 수 있었던 오늘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일주일 전에 무턱대고 내맘대로 민들레를 뽑질 않길 잘했다고 거듭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아이들을 위해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게 앞으로도 가끔 어려울듯 싶다. 아이들의 성장은 성급한 엄마 마음엔 때때로 너무 느리게만 보인다. 이미 경기 후반전을 뛰고 있는 셈인 엄마와 아직 전반전 경기도 시작하지 않은 채 한창 준비운동 중인 아이. 이미 전반부 경기를 한 차례 뛰어본 경험이 있는 엄마는 아이가 앞으로 좋은 점수를 내려면 뭐가 필요한 지, 뭘 준비해야 하는지 뻔히 보인다. 그렇다고 설렁설렁 준비운동을 하면서 여유롭게 경기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아이에게 이거해라 저거해라 주문만 많아지면 딱 잔소리쟁이 소리를 듣기 쉽다. 엄마의 전반전 스코어가 그닥 좋은 것도 아니면서, 나랑 계약한 감독도 아니면서. 본인 후반전 경기나 신경 쓰시지요, 하고 아이는 아마 훽 돌아서 버리겠지.

 앞으로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자꾸만 아이에게 내 속도를 강요하고 싶어질 때마다 오늘의 민들레 뽑기를 생각하련다. 아이들의 본경기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좋은 스코어를 위해서는 아이들의 준비운동이 끝난 적당한 때에 경기가 시작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100포기쯤 더 뽑으면 어떤가. 아직 체력도 좋고, 날씨도 좋고, 재미도 더 있는데. 너무 힘들 것 같으면 좋은 장갑과 호미도 손에 쥐어주고, 슬쩍 옆에서 몇 뿌리 같이 캐면서 도와주면 되지. 그러면 또 뚝딱, 힘을 합쳐 한 봉지 넘게 잡초를 뽑고 푸른 잔디를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거다. 그런 게 아이가 원하는 좋은 엄마의 모습 아닐까.


30리터 쓰레기봉지 한가득. 뿌듯하구나.


 내년 봄에도 마당의 민들레를 뽑아야 한다면, 아이들에게 또 물어봐야지. 그러면 아이들은 아니요, 아니요, 싫어요, 를 반복하다가 어느날 아주 맞춤한 때에 "아무래도 이젠 뽑아야 겠어요." 하고 솔직히 털어놓을 것 같다. 그럼 그날, 누구보다도 신나고 힘차게 잡초를 뽑아버리면 되는 거다. 오래 기다렸던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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