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정현 Jun 20. 2020

뭐든 그냥 되는 건 없다

 큰애가 방학을 맞이해서 아주 간단한 요리들을 배우고 있다. '요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가전제품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원래 부엌은 아이에겐 미지의 세계였고 엄마만의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아이에게 조금씩 그 공간이 새로운 배움으로 열리고 있는 중이다. 초등학교 3학년 큰애는 이제 햇반을 전자렌지에 데워 밥을 완성할 수 있고, 후라이팬을 인덕션 위에 놓고 스위치를 켤 수 있으며, 엄마가 옆에서 지켜보면 더듬더듬 계란후라이도 완성할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유용하게 써먹는 배움은 바로 '토스트 굽기'다.

 비닐봉지 안에 담겨있는 시판 식빵을 토스터기에 넣고 스위치를 누르면 일정 시간 뒤에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이 퐁, 하고 튀어오른다. 막 구운 식빵은 뜨거워서 손으로 잡기 어렵고, 꺼낼 때 열선에 화상을 입지 않도록 조심해야하지만 몇 번 반복하다보니 이제 아이는 아주 능숙하게 빵을 구워먹는다. 자신이 직접 스스로 해 먹는다는 성취감도 있어서 빵을 먹고 싶을 땐 이제는 절대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동생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내가 빵 구워줄까?" 하고 먼저 물어보기도 한다. 빵 섭취가 평소보다 조금 늘어난 건 귀여운 부작용 정도로 생각해 두자.


 그런데 어제, 스위치를 아무리 눌러도 안 된다고 잔뜩 울상을 지으며 부엌에서 큰애가 짜증을 냈다. 늘 하던대로 스위치를 아래로 내렸는데 빵이 열선에 가 닿질 않는다. 반복하고, 반복하고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똑같다. 토스터기가 망가진 걸까, 아니면 내가 뭘 잘못할 걸까. 혼자서 5분쯤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가 스위치를 누르고 또 눌렀나 보다.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나한테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나는 말을 듣자마자 뭐가 문제인 지 알았다.

 코드를 안 꽂았다.


 평소에는 부엌 조리대 위에 있는 전기코드에다가 토스터기와 커피포트 전선을 항상 연결해두는데, 어제는 내가 오랜만에 믹서기를 쓰느라고 잠시 뽑아두었던 것. 늘 항상 당연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그게 기본값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는 코드를 확인해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몇몇 어른들도 흔히 하는 실수다. 피식, 웃으며(아이는 이 포인트에서 굉장히 기분 나빠했지만) 어깨를 두드려주고,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전자제품이 코드에 꽂혀있어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한 거라 가끔 까먹기도 해. 그런데,


뭐든 그냥 되는 건 없어


하고 말해주었다.


엄마도 그렇다

끊임없이 전기를 공급해줘야한다

전업주부의 일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삼시세끼 밥차리고 치우는 그 수고가 만만치 않다. 애들 챙기는 데 드는 수고도 가끔은 턱까지 숨이 차오를 정도로 힘들다. 생존 수준으로만 살려고 해도 다섯식구 뒷바라지에 드는 그 에너지는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그 중 제일 힘든 거는 전기코드도 확인해볼 생각 않은 채 전자제품 탓하는 것처럼 엄마의 에너지가 그냥 나온다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오늘은 갈비탕을 끓였다. 핏물을 빼느라고 한 시간마다 찬물을 갈아주고, 끓는 물에 갈비를 넣어 잠시 끓였다. 갈비에 붙은 뼛가루라든지, 검게 엉겨붙은 핏물 따위를 다시 찬물에 바득바득 씻고, 커다란 곰솥에 넣어 아주 오랜시간동안 탕을 끓인다. 고깃국물 냄새가 밖으로 퍼져서 그런가, 대체 어찌 알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동네 파리들이 한두마리씩 우리집 부엌으로 들어온다. 파리도 내쫒고, 탕 위에 올라오는 거품도 걷어내고, 손은 계속해서 바쁘다. 후덥지근한 6월의 공기와 끓는 탕에서 피어나오는 김이 함께 뒤섞여 부엌 공기를 끈적하게 데운다. 다 때려치우고 한 그릇 사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폴란드 한식당에서 파는 갈비탕 한 그릇은 4성급 호텔에서 파는 스테이크 값과 비슷하다. 그에 반해 마트에서는 소갈비 1.5킬로그램을 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다. 그 두 가격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그 안에 나의 노동과 시간을 갈아 넣는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엄연히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전업주부인 나를 보고 '집에서 논다.'고 말한다.


 고갈된 직장인의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건 월급이겠지. 그러면 대체 나는 어디서 충전을 해야 할까. 내적 성취감과 사회적 인정이라는 두 요소가 만나야 자존감이 올라가는 건데, 월급과 진급으로 그 요소를 챙겨받는 직장인과는 달리 대체 나의 전기코드는 어디로 연결되는 건지 모르겠다. 요즘같은 땐 특히나 아이들인 석달 째 집에만 있지, 휴일도 없지, 아무런 사회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니... 24시간 전업주부의 삶은 우울하기만 하다.

 뭐든 그냥 되는 건 없는 법인데.

 

그래서 내가 그렇게나 SNS에 밥 사진 올리고, 애들 노는 사진 올리고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월급은 없어도 하트 갯수가 올라가니까. 우울하고 힘든 날엔 하루종일 내계정 남의계정 들락날락 거리다가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또 허무해지기도 한다. 제대로된 충전코드는 아닌 듯 한데, 그나마 가끔씩 운좋으면 파르르 스파이크라도 튈 때가 있다.


오늘은 이따가 갈비탕 사진이나 좀 올려봐야겠다.


이전 02화 딱 일주일만 기다렸다가 민들레를 뽑았더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