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혼과 재혼 가정에서 자란 아이의 이야기



다행히 새엄마는 우리를 때리진 않았다. 


아빠가 없으면 밥을 안 줘서 좀 그랬지만..


그때 내 동생 나이 6살, 나는 9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기 전, 그땐 가끔 괜찮은 날도 있었는데.


새엄마랑 아빠가 그의 친척집에 우릴 보내버렸을 때 그쪽 나이 많은 조카들이 우릴 무시하고 때리는 일은 있었다. 밥은 굶지않게 챙겨줬다.



새엄마랑 살 때 아빠 없으면

밥을 안 준다고 해서 서운했던 기억은 없다.


어차피 준다 해도 입맛도 없었으니까.


백화점에서 아빠에게 인형을 사달라는 나를 뒤에서 몰래 꼬집고 노려보던 그가 무서워서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엄마를 속여가며 몰래 바람피울 만큼 좋아한 여자였기에 우리에게도 잘할 거라 믿고 있었나 보다.


- 아빠는 우리가 새엄마랑 사는 게 불편하진 않은지나,


- 나중에 그 여자 친척집에 우리를 보내버렸을때도 혹여 그 집 식구들이 우릴 서럽게 하거나 잘 대해주는지에 대해서도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묻지도 않는 말에 투정 부리고 보채봐야 돌아오는 건 비난과 상처밖에 없었으니..


내가 죽고 싶어 울고 있으면

티비 보는데 방해된다며 시끄럽다고 화를 내던 그 모습도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분들은 전혀. 기억을. 못하겠지만.


원래 돈도 빌려간 사람은 기억  못 해도 빌려준 사람은 기억하는 것처럼,


때린 사람은 기억 못 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하는 법이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하루 한 끼를 먹고도 잘 버틴다.


하지만 그때 내 동생은 배가 많이 고팠을 것 같다.


당시엔 엄마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은 나이라 동생까지 챙길 여력이 나지 않았거나, 저 힘든 거밖에 몰랐기 때문이겠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새엄마네 집에 있을 땐, 내 옆에 분명 동생이 있었을텐데 그 모습이 기억나질 않는다.


블랙아웃.


인간의 뇌는 갑자기 충격이 너무 크면 스스로 살기 위해 기억를 지운다고 했던가.


잠시 여행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새엄마가 생긴 상황은 루 아침에 온 우주가 뒤바뀌는 일과도 같았으니까.


아빠가 친구라며 고깃집에서 소개했던 그 여자가 엄마를 두고 바람 피운 대상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울했던 나는 배고프지 않더라도 어린 내 동생만큼은 냉장고를 뒤지다 쫓겨나는 한이 있거나, 새엄마랑 싸워서라도 밥을 챙겨줄걸 싶어 많이 후회된다.




우울한데, 그게 우울이란 감정인지도 몰랐던 9살이었다.


그저 부모님에겐 밝은 아이, 말 잘 듣는 아이로 잘 보여야지만 버려지지 않을 거란 본능적인 직감이 나를 사춘기 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게 만들었다.


아빠랑 싸운 다음날, 가방 싸서 집을 나가던 엄마의 발 한쪽을 현관에서 간신히 붙잡은 채 온몸에 땀이 나도록 버텼던 6~7살 즈음의 기억도 한몫했으리..


위태로운 부부일수록, 자신들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로 알고 있다.

평생을 자기만 희생하고, 손해 봤고, 개고생 했다고.


자기를 고생시킨 가족이나 주변인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며 ' 남탓 '하기 바쁘다.



위의 사실들은 부모님은 평생 동안 모르시는 일이다.


어차피 아무리 말해도 제대로 들을 생각이 없다는 걸 어린 나이에 이미 깨달았고,


커서도 가만히 지켜보니 자신들의 인생조차 정리되지 않아 서로 싸우고, 비난하기 바쁜데 감히 나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걸 수차례의 경험들과 상처를 얻고 나서야 포기할 수 있었으니..


이렇게 풀어내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오랜 시간 아팠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아픈데 아픈지도 모르고 살았던 순간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시댁 다락방에서 신혼을 시작하는 게 그리도 좋았던 이유는..


더 이상 밥상머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두 분이


- 누가 상대에게 더 깊은 상처 줄 수 있는지를 가리는 잔인한 배틀을 벌이거나,


- 서로의 자존감을 깔아뭉개고 싶어 안달 난 꼬락서니를 보지 않아도 되어서다.


말이 아닌. 칼을 뱉어내는

그 행동들에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의 영혼에 상처를 주는.


그 끔찍한 소음들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들은 뭐라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우리 시부모님과 다 같이 둘러앉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그 시간들이 너. 무. 도 행복했다. 


호텔 뷔페가 아니어도 좋다.

방바닥에 신문지 몇장 깔아두고 웃으며 고구마 하나라도 노나 먹는 그 순간들이 훨씬 더 행복했다.


그렇게 밥을 먹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던 경험은.. 그간 스스로가 얼마나 가여웠는지를 깨달았던 순간이라 동시에 무척 슬프기도 했다.



그동안 난 별로 상처받지 않았어!

저런 조금 아픈 경험쯤은 누구나 다 있는 거야! 라며 간신히 정신승리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과 외로움, 그 상처들을 지워버리고자 쇼핑 중독 증세에 시달리는 것을..


스스로 치유했다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 후에야..


사람이 마음으로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고, 드디어 피하고 싶었던 그 진실들을 마주 하게 된 것이다.


그간 내가 어떤 밥을 먹으며 자라왔는지도 알게 되었으니..


- 1년 350일은 걸리는 감기와

-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비염과 축농증,

- 주기적으로 뒤집어지는 피부염,

- 잦은 소화불량과

- 친구가 웃을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소리가 나는 예민한 장을 가진 원인과

- 정신과 상담 기록이 남더라도 부산에서 서울까지 병원을 다니는 이유가..


전적으로 내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결혼하고서야 알게 된 셈이다.


부모를 부정하면

나의 존재까지 부정당할지도 모른단 두려움에


-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잘못이 없어, 없을거야.

-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지.. 라고 마냥 이해하려 드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었음을 정신과 상담과 심리학, 교육학 공부를 하며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지금은 결혼 후 나이는 훨씬 더 먹었지만, 이 모든 증상들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음이 치유되면, 몸도 치유되나 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사람이 태어난 이유에 대해 어릴 때부터 고민해 왔고, 종교와 철학, 심리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상처받아도 받은지를 모르고,

슬퍼도 슬픈지를 모르고,

아파도 아픈 게 당연한 건 줄 알고 버텨온 그 어린 영혼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기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