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장노아 Noah Jang
Dec 18. 2023
집에서 나오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온 전화를 받은 경진은 첫눈에 대해 얘기하며 즐거운 발걸음으로 대문 쪽으로 향했다. 정원을 지나던 연수는 현관 쪽을 돌아보았다. 민우가 포치에 서서 떠나는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묵례를 하고 돌아서던 연수는 2층 발코니에 누군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얀 마스크에 자주색 털모자를 쓰고 연보라색 담요로 몸을 감싼 사람이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아담한 키의 마른 여자였다. 민우는 연수가 2층을 응시하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연수와 발코니의 여자는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이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잠시 후, 민우가 발코니에 나타났다. 여자의 모자와 담요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는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안고 데리고 들어갔다. 연수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은희가 아니다...?"
연수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추리가 보기 좋게 빗나갔다. 2층에 있는 여자가 심한 입덧 때문에 쉬고 있는 한민우의 부인 혜미 정이 아니라 절단한 다리를 치료 중인 이은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층 발코니의 여자는 두 발로 걸었다. 이은희라면 그럴 수 없다. 한민우가 혜미 정과 함께 있는 게 사실이라면, 이은희는? 연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경진은 차 안에 앉아서 여자친구와 통화하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차에 올라탄 연수가 뒤통수를 치자 씩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뭐 같아?"
연수가 손바닥 위에 놓인 붉은색 섬유 조각을 보여주었다.
"피가 말라붙은 거즈 같은데?"
경진이 바짝 들여다보며 답했다.
"이은희 피일 거야."
연수가 섬유 조각을 증거물 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뭔 소리래?"
"한민우가 2층에서 내려왔을 때 바지에 붙어 있었어."
"그럼 부인 피겠지."
"아니, 이은희야."
"2층에 있는 여자가 혜미 정이 아니고 이은희라는 거야?"
경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셋이 같이 있어."
"함정에 빠졌다는 이반 말을 믿어?"
경진이 피식 웃었다.
"응."
"재벌 2세 부부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해? 미국에서 잘 살던 사람이 갑자기 한국에 와서 부인과 함께 이반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다? 사람 다리를 자르면서까지? 한민우는 입국 전이나 후나 이은희와 연락하거나 통화한 적도 없어. 증거도 동기도 없어. 누나가 뭐에 꽂혔는진 모르겠지만, 이번엔 너무 멀리 간 거 같은데..."
경진이 말했다.
"먼저 들어가. 난 가볼 데가 있어."
연수는 굳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연수는 국과수 오희선 과장의 사무실로 갔다. 그녀는 형사와 보호자에게 부검 결과를 설명하고 있었다. 네 살 아동이 친부의 학대로 인해 사망한 사건이었다. 밝은 갈색으로 머리를 탈색한 스물 중반의 여자가 친모인 것 같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코입이 퉁퉁 부어 원래의 얼굴을 짐작할 수 없었다. 나이 지긋한 형사의 표정은 침통했다. 그들이 떠난 후 희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드시죠..."
연수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학대 사망 사건이 늘 그렇지만, 오늘 아이 상태는 너무 처참했어. 부검하는 동안 지옥에 갇힌 느낌이었어.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만든 지옥..."
희선의 사무실에는 크고 작은 색색의 인형이 가득했다. 책상에는 반려동물인 고양이와 강아지의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다. 연수는 예전에 희선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귀엽고 예쁜 인형들이, 집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와 강아지 두 마리가 힘들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 준다고 했다. 연수는 선물로 가져간 노란색 고양이 인형을 희선의 무릎 위에 놓았다.
"아이고, 이뻐라."
희선이 고양이 인형을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강연수, 반갑다! 우리 17년 만이지? 근데 딱 봐도 알아보겠어. 그대로야."
희선이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인사가 늦었어요."
"괜찮아. 내가 그 사건 맡았을 때, 지금 연수 나이였지."
"네."
"특채로 경찰 됐다는 소식 들었어. 지금은 형사과에 있고."
"네."
"어머니는 건강하시지?"
"네."
"아버지는...?"
희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덕분에 감방에서 푹 썩고 있죠."
연수가 씩 웃으며 답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씩씩해서 좋다."
희선이 연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17년 전, 희선은 연수의 부친 강승현이 저지른 미성년자 강간 살인 사건에서 부검을 맡았고 재판정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신입 법의관이었던 희선의 첫 부검이었다. 피해자는 연수와 가장 친한 친구 임수아, 당시 만 16세였다. 연수와 피해자는 어릴 때부터 서로의 집을 오가며 친자매처럼 지냈다. 피해자의 모친 황명자는 지적장애 3급으로 평소 연수를 딸처럼 여겼다. 살인 용의자의 딸인 연수는 황명자와 함께 부검을 참관했다. 희선이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황명자가 연수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수는 자신의 아버지가 강간하고 죽인 친구의 부검을 지겨보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연수가 희선에게 증거물 봉투를 건넸다.
"무슨 사건? 아무 정보도 없네?"
희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반 사건 피해자 DNA와 대조해 주세요."
"그건 윤정렬 원장님 사건인데... 무슨 비밀이라도 있니?"
"개인적으로 조사하는 거라서요."
"외압이 있거나, 언론에 알려지면 안 되는?"
"네."
"요건 뇌물이구나?"
희선이 고양이 인형을 흔들었다.
"네."
"대신 비밀 알려줘."
"결과 나오면 말씀 드릴게요."
"17년 전, 그날의 진실 말이야."
희선이 연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연수는 희선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증거가 명백한 사건이라 논란이나 이견 없이 신속하게 수사가 진행됐고 대법원까지 세 번의 재판 끝에 징역 45년이 확정되었다. 연수의 부친은 체포 직후부터 재판이 끝날 때까지 범행을 극구 부인했다. 자기 딸이자 피해자의 친구인 연수가 진범이며, 딸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력 언론사와 여러 차례 인터뷰도 했다. 분노한 시민 단체들은 재판 때마다 집회를 열어 사형 선고와 지체 없는 집행을 촉구했다. 그의 반성 없고 파렴치한 태도는 양형 가중인자로 반영되어 최종심에서 1심보다 무거운 형이 선고되었다. 당시 태권도 최연소 국가대표였던 어린 연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검을 담당했던 희선만 제외하고.
"내가 제대로 한 걸까, 아직도 가끔 그 사건이 떠올라."
희선이 말했다.
"다 알고 계시잖아요."
연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한테 듣고 싶어. 전부 다."
"언젠가..."
연수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 좋아. 약속한 거다."
희선이 활짝 웃으며
"요건 내가 금방 확인해 줄게."
증거물 봉투를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