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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Dec 10. 2023

저를 모함하고 있군요

저녁식사를 마친 형사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다들 조서와 보고서를 쓰느라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키보드 위에서 바삐 손을 움직였다. 이반의 변호사를 만나고 오는 원호의 얼굴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오늘 진술은 무효야.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단다. 변호인 동석 하에 내일부터 다시 시작한다. 자백은 없을 거 같다. 나머지 사체 유기 장소 알아내는 게 급선무야. 그날 새벽 이반 차량 이동 경로는 알아냈어?"

원호가 경진에게 물었다.

"서초 IC에서 경부로 빠져서 영동고속도로 탄 거까지 나왔어요."

경진이 답했다.

"사체 유기하러 간 거 확실하네."

재용이 말했다.

"유기 장소 특정되면 끝나는 거야. 참, 한지민은 뭐래?"

원호가 연수에게 물었다.

“이은희가 이반의 치명적인 사진과 영상을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돈을 주러 그날 새벽 아파트 근처에 가서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했고 그냥 집으로 왔다. 이은희가 죽은 건 오늘 알았다. 끝."

경진이 대신 답했다.

“범행 후 사흘이면 신랑과 신부가 말 맞추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뭐라 꾸며댄들 누가 알겠어. 중요한 건 휴대폰 위치 추적 결과, 이반과 한지민이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간대에 아파트 인근에 있었고, 피해자와 문자를 주고받았다는 거야. 만나러 갔는데 못 만났고 알고 보니 죽었다? 초딩도 비웃을 알리바이지.”

재용이 코웃음을 쳤다.

“거짓말이라면 좀 더 그럴듯한 상황을 꾸며내지 않았을까?”

연수가 말했다.

“홧김에 일 저질렀다 들통나니 횡설수설하는 거야."

재용이 말했다. 

"우발적 살인 아닐걸?"

선규가 국과수 부검감정서를 흔들며 걸어왔다.

"어, 왔냐. 박사님 뭐라셔?"

원호가 서류를 받으며 물었다.

"살아 있을 때 절단됐고 마취제 성분 검출됐대요.”

“마취제?”

“외과 수술할 때 쓰는 거래요."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토막 내다가 깨어나서 마취시킨 걸까?”

재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 바보야? 어차피 죽일 거 번거롭게 누가 그래. 애초에 마취제를 사용한 거지."

경진이 말했다.

"마취제를 준비해 갔다면..."

재용이 중얼거렸다.

"1급 살인이지."

선규가 말했다.


연수는 다들 퇴근한 사무실에 남아 한민우에 대해 조사했다. 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한재구 회장의 차남이고 미국에 거주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계정도 없었다. 한지민의 인스타를 찾아 들어갔다. 이반과 함께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팔로워는 30만 정도였고 댓글 기능은 잠겨 있었다. 전부 검색했지만, 한민우와 관련된 게시물은 없었다. 한민우의 전과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깨끗했다. 출입국기록을 확인했다. 2023년 11월 6일 입국. 그는 한국에 있었다.


자정이 넘어 집에 돌아왔다. 연재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연재는 수학 문제집을 풀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어깨를 흔들어 깨우니 누나! 하며 환하게 웃고는 침대에 들어가 곧바로 잠이 들었다. 연수는 문제집과 공책을 정리하다가 책상 앞에 잔뜩 붙어 있는 포스트잇 쪽지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엄마를 위해 열심히'라고 적힌 하늘색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연수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포스트잇을 떼려다 멈칫했다. 잠시 연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이불을 잘 덮어주고 방에서 나왔다.


욕조에 앉아 깜박 잠이 들었다. 꿈에서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 암흑 속에서 줄에 매달려 누군가를 뒤쫓았다. 바닥을 딛지도 않았는데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달리기만 할 뿐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 수 없었다. 고개가 앞쪽으로 고정되어 줄을 조종하는 사람을 올려다볼 수도 없었다. 앞서 도망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들리고 짙은 안개가 주변을 둘러쌌다. 안갯속에 떠 있는 어떤 물체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봐도 멀리 있는 것처럼 형체를 명확히 분간할 수 없었다. 손을 뻗어 물체를 잡았다. 꼭두각시 줄이 끊어졌고 한없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추락하는 동안 물체를 살펴보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들여다보았다. 형상이 점차 선명해졌다. 그것은 욕조에서 발견된 사체 토막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욕조 안이었다. 욕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남자가 욕조를 향해 걸어왔다.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샤워 커튼 뒤로 몸을 숨기고 웅크렸다. 남자가 열린 커튼 틈으로 욕조 안에 놓인 사체 토막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남자가 몸을 돌려 욕실을 나가려 했다. 살금살금 내다보니 남자는 한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와 다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여자는 울고 있었는데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핏방울이었다. 바닥이 피로 가득 찼다. 그들이 떠난 후, 욕조 밖으로 나왔다. 그들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한쪽 발이 없어 중심을 잃고 허우적댔다. 연수는 욕조에 머리를 쿵 부딪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침대에 누워 꿈속의 남녀에 대해 생각했다. 한민우와 이은희. 그들이 공모해 이반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한민우가 한 달 전 한국에 온 이유가 그것이다. 마취된 이은희의 다리를 절단하고 응급처치한 후 어딘가로 옮겨 치료 중일 것이다. 한민우를 만나거나 수사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현재로선 사건과 연관 지을 동기도 단서도 증거도 없다. 참고인 조사에도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한재구 회장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이반은 한 회장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반은 그날 새벽 왜 집으로 가지 않고 고속도로를 탔을까?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정말 사체를 유기하러 간 것일까? 한민우는 아무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연수는 수면제 두 알을 먹고 겨우 잠이 들었다. 


연수의 예상은 빗나갔다. 한민우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원호가 주소지와 연락처를 주면서 면담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한민우를 조사해 달라는 이반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한민우는 경찰서 출석을 거절하고 대신 집으로 오라고 했다. 숨길 게 없다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원호는 형식적인 참고인 조사일 뿐이니 예의 바르게 적당히 하고 오라고 주의를 주었다. 


한민우의 집은 도곡동 매봉산 바로 아래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전벽돌로 마감된 건축물 위에 한옥을 올린 현대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나이 서른에 이런 집이라니... 부럽네.”

경진이 정원의 규모에 놀라며 말했다. 

한민우는 셰퍼드 두 마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 훈련된 개들이라 낯선 손님을 보고도 짖지 않았다. 한민우는 보통 키의 가냘픈 체격에 피부가 무척 하얀 편이었다. 하얀 셔츠에 하늘색 바지를 입고 올리브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한재구 회장의 이목구비를 빼닮았지만, 아버지와 달리 온화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행동과 말투도 유달리 느긋했다. 화이트 톤으로 꾸며진 응접실은 결벽증이 느껴질 정도로 정갈했다. 하얀 벽에 다양한 크기와 색채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크고 하얀 도자기도 여럿 있었다. 

“와, 미술관 같네요.”

경진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민우가 따뜻한 허브차를 내왔다. 

“집안일을 하시는 분은 안 계신가요?”

연수가 물었다.

“오전에 도우미 두 분이 요리와 청소를 하고 가십니다.”

“부인께선 외출하셨나요?”

“2층 침실에서 쉬고 있습니다. 입덧이 심해서...”

"저희 큰 누나도 쌍둥이 가졌을 때 고생 많이 했어요. 생강차나 토마토가 좋다고..."

경진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 사건, 많이 놀라셨죠?”

연수가 물었다.

“네.”

대답과 달리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예 귀국하신 건가요?”

“지민이 결혼 때문에 잠시 들어온 겁니다.”

“이반 씨와는 관계가...”

“같이 어울려 노는 친구였죠."

“이은희 씨, 아세요?”

"예전에 이반 소개로 알게 됐습니다.”

"이은희 씨와는 어떤 관계셨나요?"

"친구의 지인 정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인가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셋이 만났을 겁니다."

"이번에 이반 씨는 안 만나셨나요? 친구이자 매제가 될 사람인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이유는요?"

"이반의 사생활 문제라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민우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 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 당일 새벽에 어디 계셨나요?"

"집에 있었습니다."

"이반 씨는 한민우 씨가 이은희 씨와 짜고 자기를 함정에 빠뜨렸다고 주장합니다."

경진이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도 말하던가요?"

"아니요."

"이반이야말로 저를 모함하고 있군요."

민우가 피식 웃었다.

2층에서 벨이 울렸다. 여자의 희미한 목소리도 들렸다. 

"아내 호출이네요. 필요한 게 있나 봅니다." 

민우는 연수와 경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그가 내려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던 그는 바지에 붙은 손톱 만한 빨간색 섬유 조각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그리고 차를 마시려다가 식은 것을 깨닫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궁금한 게 더 있으신가요?"

민우가 말했다.

“이은희 씨, 정말 죽었을까요?”

연수가 물었다.

“글쎄요... 그건 이반이 잘 알겠죠.”

민우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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