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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Dec 02. 2023

그 여자가 돈을 달라고 했어요

통제실에서 지켜보던 인곤이 피식 웃었다.

"연기력이 제법이야. 깜박 속겠어."

"거짓말 같지 않은데요?"

정현이 말했다.

"저놈 잔망스러운 수작이 안 보인다면, 자네 바닥 생활 헛한 거야."

인곤이 정현을 보고 혀를 찼다.

"강 형사는 어떻게 생각해?"

정현이 연수에게 물었다.

"제 생각에는... 이은희 살아 있습니다."

연수가 잠시 머뭇거리다 했다.

"뭔 소리야?"

인곤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일부러 신체 일부를 남겨 놓고 사라진 것 같습니다. 발목이 절단된다고 죽지는 않으니까요."

"그래, 그럴 가능성도 있지."

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가 왜 그런 짓을 해?"

인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복수겠죠."

연수가 답했다.

"복수?"
인곤이 으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강 형사 애거서 크리스티 팬이야? 실제 살인은 소설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 이건 아주 간단한 사건이야. 저놈과 피해자는 연인이었고, 스타 되고 재벌 사위 되려다가, 피해자가 집요하게 구니까 싸우다 홧김에 죽인 거야. 처음부터 살인을 계획하고 갔을 수도 있고. 암튼, 사체 토막내서 차에 싣느라 들락날락할 때 이웃 남자가 경찰에 신고했고, 사이렌 소리에 놀라 마지막 신체 일부를 두고 허둥지둥 도망친 거야."

"남은 사체는 발 하나였습니다. 품 안에 숨기고 도망치는 게 자연스럽죠. 게다가 이반은 피 묻은 양말을 신고 있었어요."

"양말? 그게 어때서?"

인곤이 고개를 갸웃했다.

"욕실에서 사체를 토막내야 한다면 누구든 먼저 양말을 벗고 들어가겠죠. 맨발의 피는 물로 씻어내면 간단하지만, 피 묻은 양말과 신발은 처리해야 할 귀찮은 증거물이 되니까요. 그런데 이반은 피범벅이 된 양말로 돌아다니다 그대로 신발을 신고 현장을 떠났어요. 피 묻은 지문을 남긴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욕실에서 사람 신체를 발견하고 겁이 나 도망쳤다는 이반의 진술은 거짓이 아닐 겁니다."

"사람 죽여 놓고 제정신이었겠어? 양말 따위 일도 아냐. 황당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잖아."

"나머지 사체가 발견되기 전까진 가능성을 열어 놔야죠."

정현이 말했다.

"아, 시끄러. 탐정 놀이 집어치우고 사체 유기장소나 얼른 알아 내. 복수를 위해 스스로 발목을 끊고 사라졌다니, 그런 개소리가 어딨어."

인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통제실을 나갔다.


기획사 대표 김찬일과 이반의 약혼녀 한지민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왔다. 신부화장을 지운 지민은 단발머리에 평상복 차림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는 아랫입술이 붓고 피가 배어 나온 상태였다. 눈에는 눈물 대신 독기가 가득했다. 갈색 서류 가방을 든 나이 지긋한 변호사 주호영은 평온한 얼굴로 지민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이반이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향했다.


지민은 아무 말 없이 이반을 꼭 안아주었다. 이반은 엉엉 울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변호사가 기다리다 못해 헛기침을 할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나서야, 지민은 이반을 놓아주었다. 이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지민은 변호사와 대화를 나누다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력팀을 찾았다. 변호사가 바로 뒤따라왔다.

“오빠는 살인자가 아녜요!”

지민이 형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녁을 먹고 있던 형사들이 놀라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지민 씨에게도 곧 참고인 출석 요청을 할 겁니다. 사건 전날 피해자와 통화하신 내역이 있고, 이반 씨 행적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원호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지금 말하겠어요. 교활하고 뻔뻔한 거머리 같은 그 여자가..."

"지민 아가씨."

변호사가 지민의 귀에 뭔가 속삭였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연수와 경진이 지민과 변호사를 진술청취실로 데리고 갔다.

"그 여자 아주 악질이에요..."
지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말을 시작했다.

"형사님, 이 진술은 서면으로 작성되거나 법원에 제출될 정식 진술이 아니고, 수사에 도움을 주기 위한 사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영상 촬영이나 녹취는 거부합니다."
변호사가 지민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계속하시죠."

연수가 지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파악하셨겠지만, 그 여자는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마약 공급책이었어요. 오빠는 그 일에 엮이거나 소문이 날까 두려워했어요. 그래도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정이 있어선지 인연을 끊질 못했어요. 며칠 전에 여자를 만났어요. 자기가 오빠와 연인 관계라며 미친 소리를 했어요. 아이도 낳았다면서요. 완전히 정신 나간 여자죠.”

“언제 만나셨죠?”

“수요일 저녁요. 그날 오전에 친구들과 라운드 중이었는데 전화가 왔어요. 사진이니 영상이니 주절거리더군요. 짜증이 나서 바로 끊어버렸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어요. 유치하고 지저분한 수작이잖아요. 따끔하게 경고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친구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가 전화를 했어요.”

"무슨 대화를 나누셨나요?"

“그 여자가 돈을 달라고 했어요. 오빠와 관련된 사진과 동영상 원본을 넘기겠다면서요. 그리고 우리 앞에서 영원히 꺼져 준다고 했어요.

“얼마를 요구하던가요?

"20억요."

“주셨나요?"

"저녁에 돈을 일부 마련해서 차에 싣고 약속장소로 갔어요. 청담동 갤러리 골목에 있는 '에반스'라는 와인 바요. 그 여자가 자료를 내놓지는 않고 오빠와 계속 만나고 있다는 둥 헛소리를 했어요. 그리고 오빠가 나와의 성관계에 대해 불평한다고 지껄였어요. 화가 나서 술병이며 유리잔을 다 쓸어버리고 얼음통을 그 여자 머리에 쏟아부었어요. 직원들이 룸에 달려 들어와 말렸어요. 그러자 서럽게 울면서 연약한 척 연극을 하더군요. 가증스럽고 기가 막혀 그냥 나와 버렸어요.”

“그게 마지막이었나요?”

“아뇨. 그 지긋지긋한 여자..."

지민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전화가 왔어요. 왜 돈을 놓고 가지 않았냐면서 다시 만나자고 했어요. 아니면 결혼식 날, 인터넷에 전부 유포하겠다고 했어요."

"사진과 동영상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하던가요?"

연수가 물었다.

지민이 착잡한 표정으로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 투약과 가학적인 성행위가 담긴 영상이라고 했어요. 오빠가 연예계는 물론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될 거라고 했어요. 믿진 않았지만... 걱정이 됐어요."

"돈을 건네고 자료를 받으셨나요?”

"만나지도 못했어요. 새벽 1시 반에 자기 아파트에서 보자고 해서 근처에 주차하고 기다렸어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서 문자가 왔어요. 갑자기 누가 집에 와서 1시간 후에나 만날 수 있다고요. 짜증이 나서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어요. 새벽 3시까지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왔어요."

"집에 찾아가진 않으셨어요?"

"주소를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가요?”

“이은희 씨를 만나기로 한 사실을 이반 씨에게 말하셨나요?”

“아뇨... 예전에 그 여자 때문에 몇 번 크게 싸운 후로 그 여자 얘기는 서로 꺼내지 않아요. 그날도 오빠에게 일찍 잔다고 하고 만나러 간 거였어요. 오늘에야 그날 새벽에 그 여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사망 여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체 일부가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사건은 살인이 아니라 실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사님?"

변호사가 말했다.

"네."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인이면 좋겠어."

지민이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가 정색했다.

"죽어서 그년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민이 소리쳤다.

“그날 비슷한 시각에 이반 씨도 이은희 씨를 만나러 아파트로 갔습니다.”

연수가 말했다.

“그 여자 속셈을 알겠어요. 누가 집에 찾아와서 늦는다고 했잖아요? 공범과 짜고 우리에게 돈을 뜯을 생각이었던 거예요. 오빠도 한참 기다렸다고 했어요. 우리를 동일한 시간, 다른 장소에 불러내서 이중으로 돈을 챙기려고 한 거죠. 근데 일이 틀어졌어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살인이든 발목 절단이든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인 거예요. 다들 돈 때문에 미친 짓을 하잖아요. 오빠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여자 집에 갔고 공범 대신 누명을 썼어요. 오빠가 들어갔을 때, 그놈이 집 안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르죠. 경찰에 신고했다는 이웃 남자, 전 그 남자가 의심스러워요.”

지민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이반 씨의 진술에 따르면, 이은희 씨는 금전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돈은 저한테만 받아 내고 오빠에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요! 애초에 공범은 돈을 받은 후에 그 여자를 해치고 오빠에게 누명을 씌울 계획이었어요. 발목 절단? 오빠는 절대 못해요. 마음이 약해서 집 안에 날아 들어온 풍뎅이 한 마리도 못 죽이고 고이 잡아서 내보내는 사람이에요."
"이반 씨가 결백하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을까요?”

연수가 물었다.

"누명을 쓸까 봐 그랬다고 했어요."

"오빠 분 성함이 한민우 씨죠?"

"네."

"이은희, 이반, 한민우 씨. 세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요?"

"왜요?"

"이반 씨가 이은희, 한민우 씨가 공모해 자기를 함정에 빠뜨린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말도 안 돼!"

지민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술청취실에서 나갔다. 변호사가 연수와 경진에게 목례를 하고 지민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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