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는 컴컴한 거실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연재의 방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연재를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연수가 싫어하는 사람과는 다시 접촉하지 않을 것이다. 연수는 자기 방으로 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천장 모퉁이 가장 어두운 구석에 시선을 고정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수아가 아니라 내가 죽었어야 했다. 아니, 그랬다면 착한 수아는 그놈을 감방에 처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아를 괴롭히기 전에 내가 죽였여야 했다. 아직 기회는 있다. 사회적 매장 다음 단계는 진짜 죽음이다. 그놈이 감방에서 기어 나오는 날이 바로 제삿날이다.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모퉁이의 어둠이 작아졌다 커졌다 했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이반 사건의 여러 의문이 잠결에 혼란스럽게 떠올랐다.
연수는 한민우의 집 정원에 있다. 여자가 2층에서 연수를 쳐다본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원피스 차림이다. 유령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한쪽 발이 없는데도 중심을 잘 잡고 서 있다. 연수는 여자의 손을 확인한다. 오른쪽 손목 아래 부분이 없다. 발과 손이 없는 여자. 이은희다. 그런데 얼굴이 다르다. 여권 사진 속 혜미 정의 얼굴이다. 혜미 정이 난간 위에 올라섰다 훌쩍 뛰어내린다. 한민우 집 2층이 아니다. 높은 건물 옥상에서 한없이 떨어진다. 연수는 여자를 향해 달려가지만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하얀 천에 덮인 여자가 부검실에 누워 있다. 오희선 과장이 서류에 뭔가 기록하며 부검을 준비한다. 연수는 천을 들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다. 이은희다. 아니, 혜미 정이다. 두 여자의 얼굴이 섞여 알아보기 힘들다. 바꿔치기야. 오 과장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연수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바꿔치기. 바꿔치기. 바꿔치기...
꿈에서 깬 연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사 초기부터 내내 마음을 어지럽혔던 가장 중요한 의문이 풀렸다. 욕조 안 사체 토막은 누구의 것인가. 이반의 별장에서 발견된 사체는 누구인가. 한민우 집에서 가지고 나온 섬유 조각의 피가 욕조의 사체 토막 DNA와 일치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너무 쉬운 트릭이었다. 그래서 더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알람시계를 보았다. 6시 45분. 창밖은 아직 어두컴컴했다. 해자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수는 박원호 팀장에게 전화했다. 벨이 한참 울려도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했다.
"연수냐? 알람인 줄 알았네..."
전화를 받은 원호가 비몽사몽 중얼거렸다.
"알아냈어요."
연수가 밖으로 뛰어나가면서 말했다.
"뭘 알아내, 인마..."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어디 계세요?"
"어제 다들 한잔 걸치고 서에서 잤다. 넌 언제 도망갔냐?"
"금방 가요."
"야, 오지 마. 더 잘 거야..."
원호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연수는 전화를 끊고 택시를 잡아탔다.
원호와 재용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회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담요를 덮어쓰고 소파에 누운 사람이 요란하게 코를 골았다. 소파 아래 뒹굴고 있는 운동화로 보아 경진이 같았다.
"욕조에서 발견된 사체 토막, 이은희 아닙니다."
연수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누군데?"
재용이 기지개를 켜며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혜미 정, 한민우 아내요."
"뭔 갑툭튀야. 인마, 그건 너무 나갔다."
원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은희에겐 DNA를 대조할 가족이 없고 혜미 정은 한국 국적이 아니라 정보가 없다는 점을 이용한 거죠. 이은희 집에서 발견되었고 혈액형이 같다는 결과만으로 속단한 겁니다."
"별장에서 발견된 사체도 이은희 맞는데 무슨 소리야?"
재용이 반박했다.
"지문이 남은 타다 만 손 하나만 이은희, 나머지 완전히 불에 탄 사체는 혜미 정입니다. 신원이 확인되었으니 작게 토막 나고 불에 탄 사체를 그러모아 굳이 DNA 확인 대조까지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 두 사람 사체가 섞였다고?"
원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죠. 죽은 사람은 혜미 정입니다. 이은희는 살아 있고요."
연수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욕조의 발과 별장 사체는 혜미 정이고, 이은희는 한쪽 손목만 잘라 별장 사체에 섞어 놓고 어딘가에 살아있다, 이거죠?"
어느새 잠에서 깬 경진이 소파에 앉아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맞아."
연수가 답했다.
"말 되는 거 같은데?"
경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개소리들을 하고 있어? 그럼 애초 살해 대상이 혜미 정이었다는 거야? 이반이 왜 어떻게 이은희 집에서 혜미 정을 죽여? 한민우가 가만있겠어? 앞뒤가 하나도 안 맞잖아. 사람 죽이는 간단한 방법 많은데 왜 그렇게 복잡한 짓거리를 하겠냐. 미친놈도 아니고."
재용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휴, 형! 이해력 딸려? 누나 말은 이반이 아니라 한민우가 범인이라는 거야."
커피믹스를 타온 경진이 한잔씩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새꺄! 그건 더 신박한 개소리야!"
재용이 경진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그만큼 복잡한 이유가 있겠죠. 며칠 만에 범인 잡았다고 사건 주변인들 배경 동기 관계 제대로 탐문하지도 않았잖아요."
연수가 원호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그때, 사무실에 들어온 박인곤 서장을 보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연수! 넌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인곤이 연수 면전에 휴대폰을 흔들며 소리쳤다.
유튜브에서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지난밤, 연수가 현희의 목을 조르는 장면이었다.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 폭력 경찰, 취재 중인 여기자 폭행하다! 이거 밤새 유튜브랑 인스타에서 좋아요 얼마나 받았는지 알아?"
인곤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들 각자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검색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부로 사건 배제다. 잠잠해질 때까지 집구석에서 근신해. 징계 먹을 각오하고."
"악의적 편집입니다. 취재 중인 기자가 아니라..."
연수가 항변했다.
"걍 짜져 있어. 이유불문하고 시민 폭행 자체가 경찰 식구들 얼굴에 똥칠하는 용납할 수 없는 짓거리야. 박팀장은 오늘 브리핑 자료랑 현장 검증 준비 철저히 해. 빨리빨리 마무리해서 검찰로 넘기자고. 매일 떼거지로 몰려드는 기자 놈들이랑 피켓 흔들어대는 코찔찔이 울보들 꼴 그만 좀 보자."
인곤은 말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팀장님, 국과수에 손과 발, DNA 대조 요청해 주세요. 분명 두 사람 것으로..."
연수가 원호에게 말했다.
"그만하고 집에 가라."
재용이 자기 자리로 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 팀장, 잠깐 서장실에서 봐."
인곤이 되돌아와 사무실 문을 열고 손짓했다.
원호가 한숨을 내쉬고 인곤을 따라나섰다.
"팀장님!"
연수가 따라갔다.
"누나, 소용없어."
경진이 연수의 팔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