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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Mar 03. 2024

천하무적 태권소녀가 되는 거야

연수는 골목길에 세워둔 차에 막 올라탄 현희를 운전석에서 끌어냈다. 현희는 차 앞쪽으로 피해 보닛에 몸을 기댔다.

"그놈 편지 왜 연재한테 준 거야?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연수가 현희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아저씨가 전해달라고 했어."

"우리 가족 일에 왜 끼어들고 지랄인데?"

"책 쓰고 있어. 아저씨하고 같이."
현희가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뭘 한다고? 그 강간범 살인자 새끼랑?"

연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아 죽인 사람, 아저씨 아니고 너잖아."

현희가 말했다.

"개소리!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나 연재가 누구 아들인지도 알아."

현희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연수는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분노로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아저씨 편지에 적혀 있더라?"

현희가 연수의 귀에 속삭였다.

연수는 현희의 뺨을 갈겼다. 현희는 비명을 지르며 과장된 동작으로 보닛 위에 엎어졌다. 그리고 블랙박스에 잘 찍히도록 슬금슬금 자리를 잡았다.

"꺼져! 미친년아!"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욕을 내뱉은 연수는 자리를 뜨려고 몸을 돌렸다.

"연재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진짜 엄마가 누군지..."

현희가 약 올리듯 말했다.

연수가 달려들어 현희의 목을 졸랐다.


자전거를 탄 인성이 급히 골목길로 들어섰다.

"강연수!"

인성이 소리쳤다.

연수는 목을 더 세게 졸랐다. 현희의 얼굴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만해! 이러다 죽겠어!"

인성이 현희에게서 연수를 겨우 떼어냈다.

풀려난 현희는 보닛 위에 엎드려 헛구역질과 기침을 해댔다. 연수는 인성을 엎어치기로 제치고 다시 현희에게 달려들었다. 인성이 연수의 다리를 잡아 넘어뜨렸다. 연수는 다른 발로 인성을 마구 걷어찼다.

"현희야! 가! 얼른!"
인성이 소리쳤다.

현희는 재빨리 차에 올라타 줄행랑을 놓았다. 인성은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연수를 붙잡아 꼭 끌어안았다. 연수가 괴롭게 신음하며 몸부림쳤다. 저만치 연재가 주춤주춤 울먹이며 걸어왔다. 인성이 가라는 손짓을 하자 힘겹게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갔다.


연수는 인성을 밀쳐버리고 무작정 달렸다. 인성은 자전거를 타고 조용히 따라갔다. 수아의 집이 있던 골목길에서 연수가 우뚝 멈춰 섰다. 습관처럼 달려온 목적지에 당황했다. 어린 시절 수아를 만나러 수없이 오간 길이었다. 수아가 살던 5층짜리 연립주택 5동은 작은 도서관과 공원이 있는 주민자치센터로 바뀐 지 오래였다. 연수는 도서관 앞 나무 벤치에 앉았다. 인성이 따라와 옆에 앉았다.

"연재가 전화했니?"

연수가 물었다.

"응, 누나 화났다고."

"고맙다. 죽일 뻔했는데."

"설마."

인성은 피식 웃었지만,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현희 걔가 사람 열받게 하는 스타일이긴 하지. 중딩 때도 완전 비호감 왕따였잖아. 너랑 수아가 놀아주지 않았으면, 애들이 상대나 해줬겠어. 친구들 연애사나 캐고 거짓말하고 이간질하고. 규동이 걔도 현희 농간에 첫사랑 여자친구가 양다리 걸친 줄 알고 헤어졌잖아. 나중에 현희가 규동이한테 고백이니 뭐니 하고 거짓말 탄로 나서, 규동이가 때려죽인다는 걸 애들이 겨우 뜯어말렸지. 그런 애가 기자가 됐다니 웃기는 일이야. 하긴 요즘 기자들 하는 짓 보면 적성에 딱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인성은 부러 쾌활하게 떠들며 연수의 눈치를 살폈다.

"넌 내가 좋아?"

연수가 물었다.

"응, 뭐, 좋아하지. 당연한 거 아닌가?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첫째로 얼굴이 예쁘다. 둘째, 마음이 예쁘다. 세 번째는 몸매가 예쁘다... 는 성희롱인가...? 암튼 결론은 엄청 예쁘다..."

얼굴이 빨개진 인성이 당황해서 주절거렸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인성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태권도장에 처음 방문한 연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연수를 좋아했다.


장마가 한창이었던 어느 늦은 오후, 우산도 없이 비에 홀딱 젖은 한 여자가 연두색 우비를 입은 여자애의 손을 꼭 잡고 태권도장 문 앞을 기웃거렸다. 여자는 남성용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아이의 신발 한 짝은 운동화, 한 짝은 슬리퍼였다. 한눈에 봐도 집에서 급히 뛰쳐나온 모양새였다. 겨루기 훈련 중이었던 인성은 유리문 너머 그들을 발견하고 재빨리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옵셔! 들어옵셔!"

인성은 옆 건물 중국음식점 주인아저씨 목소리를 흉내 내 외쳤다.

사범들과 관원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당황한 여자가 우물쭈물하더니 아이를 끌고 후다닥 가버렸다. 백시열 관장이 아들에게 꿀밤을 여러 대 세게 먹이고 여자를 따라갔다. 인성은 꿀밤 맞은 뒤통수가 너무 아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관원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어 관장실로 갔다. 커튼이 처진 수면실에 들어간 인성은 간이침대 위에 앉아 자기에게만 유독 엄격한 아버지를 원망하며 찔찔댔다.

백 관장이 여자와 아이를 데리고 관장실로 들어왔다.

"앉으세요."
그가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며 말했다.

"저희 옷이 다 젖어서..."

여자는 눈치를 보며 우물거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나중에 닦으면 됩니다."

백 관장이 말했다.

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백 관장이 사물함에서 대형 스포츠타월 두 장을 꺼내 소파에 깔아주었다. 그제야 여자가 소파에 앉았다. 여자가 아이를 끌어당겼지만 우비 모자를 깊이 눌러쓴 아이는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님인가요?"

백 관장이 물었다.

"네..."

여자가 답했다.

"태권도 배우고 싶어?"

백 관장이 아이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궁금해진 인성은 커튼 사이로 몰래 내다보았다.

"인사드려..."

여자가 딸의 우비 모자를 벗기려고 했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여자가 백 관장 눈치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안녕? 나는 천하무적 태권도장 백시열 사범님이야."

백 관장이 아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잠시 백 관장을 빤히 쳐다보던 아이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까딱했다. 인성은 여자애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강연수였다. 연수는 또래 사이에서 유명했다. 전교 1등 모범생에 얼굴도 예쁜 데다 명랑하고 상냥해서 인기가 많았다. 항상 공주 같은 원피스에 예쁜 레이스 카디건을 트레이드 마크처럼 입고 다녔다. 인성은 평소 모습과 전혀 다른 연수를 훔쳐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잘 배워... 누가 건드리지 못하게..."

연수의 엄마가 입관원서를 작성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하무적 태권소녀가 되는 거야."

백 관장이 미소를 지으며 연수에게 말했다.

연수는 내내 묵묵부답 무표정이었다.

"저기... 관장님, 아이 아빠가 싫어해서... 몰래 다닐 거예요..."

연수의 엄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수는 그렇게 태권도를 시작했다. 중학생이 된 인성은 연수에 관한 부모님의 단편적이고 조심스러운 대화를 통해 연수 모녀가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연수의 부친이 검찰수사과장이라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을 정도의 권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권도에 미친 듯 열중했던 어린 소녀는 코딱지만 한 동네 태권도장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어 아시안게임 때 금메달을 땄다. 다음 해 연수는 갑자기 잠적했다. 그리고 수아가 죽었다. 인성이 연수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재판이 시작된 후였다. 연수의 부친이 딸의 친구를 대상으로 오랜 기간 성폭력을 저질렀고 마침내 살해했다는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다. 원래 알코올중독이었던 연수의 모친은 재판 도중 상태가 더 심각해져 재활원에 입원해야만 헸다. 변변한 친인척 하나 없었던 연수의 모친은 백 관장에게 연수와 동생 연재의 후견인이 되어달라 부탁했다. 철딱서니 없는 고등학생이었던 인성은 아기가 집에 와서 좋았다. 연수도 함께 살게 되었으니까.


"상상도 하지 못했어. 내가 선수촌에 있는 동안, 그놈이 수아를 괴롭히고 있었다는 걸. 수아랑 나, 함께 죽으려고 했어. 그놈이 일하는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자고 날짜와 시간까지 잡았어. 그런데 수아 혼자 떠났어... 나도 그때 죽었어야 했어. 내가 아직 죽지 않은 건... 할 일이 남아서야."

연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죽는단 말 하지 마. 무슨 일이든, 내가 도와줄게. "

"무슨 일이든?"

"응."

"사람도 죽일 수 있어?"

"누... 누구를?"

인성의 머릿속에 연수 부친의 얼굴이 스쳤다.

"됐어. 농담이야."

연수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농담 아닌 거 알아."

인성이 따라 일어났다.

연수가 인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수와 눈을 마주치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인성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래, 농담 아니야. 그러니까, 나 좋아하지 마."

연수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다 잊고 우리 행복해지자. 연재도 나 좋아해. 벌써 몇 년 전부터 매형이라고 부르고 어머니도 사위로 생각하신다고."

인성이 말했다.

"데이트 한번 안 했는데 프러포즈야?"

연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 뭐, 나랑 어머니랑 연재는 이미 한 가족이니까, 너만 끼면 돼."

인성이 말했다.

"고맙다..."
연수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금세 표정이 싸늘해졌다.

"근데, 구역질 나는 우리 집구석 가계도에 누군가 끌어들일 생각 전혀 없어. 얼른 참한 신붓감 찾아 결혼해서 부모님께 효도해라."

연수는 차갑게 말하고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인성은 한숨을 내쉬고 벤치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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