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가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분명한 무리가 존재한다. 종족이랄까, 전교에서 혹은 한 반에서 자연스럽게 몰려드는 집단이 생긴다. 그것을 나는 '부류'라고 불렀는데,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내 부류가 어딘지 물색하곤 했다. 즉, 나와 어울리는 친구가 누가 있을지를 마음속으로 가려내었다.
나의 데이터 속에 있는 부류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친구들 간의 무리를 지었다 풀었다 하는 얍삽한 족속, 이 무리를 흔히들 일진이라고 부른다. 나쁜 짓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학교에서 보이는 행동들이 그다지 옳게 보이지 않던 친구들이었다. 1순위로 멀리 두었다.
둘째, 공부만 하는 공부벌레족. 이 친구들은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노는 시간 자체를 내어주지 않기에 친해지기 어려웠다.
셋째, 첫째 무리 근처에서 뱅뱅 돌며 몸에 아첨이 밴 친구들. 같은 친구에게 첨언을 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없어 가까이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공부도 노는 것도 적당히 하던 친구들. 나의 부류였다.
사실 세부적으로 나누면 더 많은 종족들이 갈라진다. 착하지만 공부와 담을 쌓은 족, 공부보다는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내는 족 등 다양한 특성을 가진 무리들이 한 반에 존재했다.
반이 바뀜과 동시에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나와 비슷한 무리가 어느 쪽인지, 나와 친해질 친구가 누구인지 학기가 시작한 후 1주일 안에 모두 결정 나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편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얍삽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고 남의 일에 참견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쁜 행동을 곁에서 보고만 있으면, 그 얍삽 행위의 피해자가 곧 내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자신에게 동조를 하지 않으면 나를 당장에 내쳐버리고는 다른 친구를 포섭하여 나에게 욕을 날리곤 했다. 물론 그 일들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그럴 때는 '친구가 잠시 없구나'하고 단념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보면 곧, 그 가해 친구가 다시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패턴을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서로의 감정에 민감하던 중학교 시절의 그 행동들은, 돌이켜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미숙한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 몰라, 친구들 사이에서 감정을 상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었을 테니.
그러나 고등학교 이후로부터는 납득되지 않았다. 진로 문제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데, 그 상황에 친구들 사이의 감정싸움까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서 중학생 때는 어느 정도 주변에 두던 첫 번째 부류의 친구들을 고등학생이 되면서 일절 가까이하지 않았다. 물론 고등학생이 되자 그런 친구들이 수적으로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같은 부류가 아니란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기에.
언제나 이런 식의 관계만을 만들 거라 생각했다. 명확한 인간관계 기준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 기준만 잘 따르면 좋은 친구들을 마음껏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자신감은 오만이었다. 사회로 나와 보니 그렇지 않았다. 학창 시절의 친구관계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 친해지기 전부터 같은 성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로 시작한 관계이다. 그러나 더 큰 세상으로 나갈수록 같은 부류를 찾기 힘들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발견해야 하는데, 반이라는 집단에 갇혀 있지 않으니 표본집단이 넘쳐버린 것이다.
심지어 알아볼 수도 없다. 저 사람이 나의 부류인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인가를 알아볼 수조차 없다. 나이, 고향, 학교 등 아무것도 겹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저 그 기본적인 정보에 집중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선 호칭 정리를 해야 하고, 나와 겹치는 것이 있는지 알아본 후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렇게 서로 무지의 상태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하나씩 알아가느라 성격이나 사람의 성질이 어떠한지 파악할 시간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류는 마구잡이로 섞여버린다. 어떤 무리에서 살아왔는지 상관없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파악할 새 없이.
졸업 직후에는 이런 실정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나는 내 부류의 사람만 나의 관계 바운더리 안에 들여놓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대학 동기, 동아리 멤버들,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사람들을 가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친하게 지낼 필요도 없었지만,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익을 따져가며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도 싫었다. 해본 적이 없으니 익숙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인생 처음으로 인간관계의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의 어린 나는, 친구 혹은 이방인으로 인간관계를 단절하듯 나누어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정확하게 이분한 것이다. 나의 관계망 안으로 들어온 내 사람들, 혹은 아닌 사람들로. 세상의 사람들은 내 친구일 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 연락을 1년에 한 번 하는 사이, 연락을 6개월에 한 번 하는 사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니 나의 관계론이 이분법적인 것도 알아채지 못했고, 덕분에 꽤나 오랫동안 혼란을 감수해야 했다. 사람들은 무수한 관계 선상에 놓인다고 내게 말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마치 온갖 행성들이 수많은 나선형 선상에 놓여서 떠돌아다니듯이 나의 관계망도 저마다의 거리와 궤도를 가진다. 그래, 사람 관계란 우주의 궤도에 놓인 행성들 간의 관계처럼 무수하고도 다양하다. 그렇게 나도, 타인도 제각각인 공전 주기에 따라 움직이고 그러다 한 번씩 마주친다. 영원히 겹칠 수 없는 궤도에 위치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관계망에서 이탈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만날 수도 있을 가능성을 갖고 굳건히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궤도를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각자의 사정이나 서로의 상황에 따라 궤도에서 이탈해 버리지만 않는다면 여전히 내 관계망 속에 있다.
가끔 생각해본다. 내 관계망, 관계 바운더리, 그 우주 같은 곳의 궤도에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과연 나와 같은 부류일까. 학교를 다닐 때 만났더라면, 우리는 같은 무리에서 생활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분명 아니다. 같은 반에서, 같은 학생의 명찰을 달고 만났더라면 졸업할 때까지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기에 그 사람들은 나와 거리가 먼 곳에서, 겹치는 주기가 그리 짧지 않게 살아가고 있지만 어찌 됐든 나의 관계망 속에 있다. 필요하다면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아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그런 관계도 있는 거다. 그저 그런 사이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모든 사람과 잘 지낼 필요도 없고, 나와 어울리지 않는 듯 한 사람과 친분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렇게 내 우주가 넓어지고 점차 많은 궤도를 생성한다. 짐작하건대, 이렇게 커가나 보다. 내 속의 우주를 확장시키면서 더욱 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