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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조하 May 14. 2020

기억은 왜 분리배출이 안 되나요

기억 대청소, 생각귀신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정신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다는 허무맹랑한 생각. 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각과 감정이 제어되지 않을 때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하고자 하는대로 생각이 되지 않고, 느끼고 싶은대로 느낄 수가 없고, 가만히 있으면 원하지 않는 감정들에 사로잡혀 내가 작아지는 기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도 이상하다. 내가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할 때는 그렇게까지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 않았는데. 생각에게 먹히면 시간도 먹히나보다. 마치, 생각귀신이 내 머리를 먹어버리는 것 같다. 


 자주 그랬다. 원하지 않는 생각과 감정들 속으로 잠식되기 일수였다. 마치 나를 내가 컨트롤 하지 못하는 느낌, 아주 불쾌했다. 그런 상태가 시작된 것은 아마 고등학생 때부터였을 것이다. 성장통을 겪은 후 자아가 커지면서, 역설적으로 자아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점점 나라는 존재가 커지고, 나에 대한 생각을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점점 더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말랑말랑한 내 자아를, 그 존재를 알아채자마자 장애물을 직시해야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 나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구나, 나는 억압된 상황에 처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를 느낌과 동시에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다고 느낀다. 학교든, 가정이든, 미성년자이기에 받는 보호.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 갈수록 그 욕망을 가로막는 것들만을 보게 된다. 동시에 불행을 느낀다. 혹은 불안을 느낀다. 무지가 사라지니 안정도 사라진다. 자의적으로 행하고, 내가 선택하는 일에 따른 책임을 가질 때마다 불안함을 느낀다. 

 문제는 기억이 축적된다는 것이다. 나쁜 경험들이 누적되고,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겹겹이 쌓인다. 결국에는 나쁜 감정들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서, 그들이 나를 지배하게 된다. 내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닌, 감정이 나를 다스리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나는 그랬다. 그런 상태는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이십대 초반까지 내 정신을 온전히 내가 다스리지 못했다. 갑작스레 우울이 찾아오면 깊이 우울해야만 했다. 그 근원을 알 수도 없이 우울만 해야 했다. 그동안 겪었던 안 좋은 일들을 굳이 굳이 모두 꺼내어 놓고 하나씩 되짚으며 시간을 보냈다. 갑작스러운 슬픔이 찾아오면, 또 내가 아는 모든 슬픈 일들과 후회스러운 일들을 다시 꺼내고 뒤집어 반복학습을 했다. ‘그래 그 사건은 참으로 슬펐지.’ 하며 곱씹었다. 

 


 그러한 과정은 마치 대청소 같았다. 온 집안의 서랍 속 물건들을 모조리 꺼내서 거실을 뒤덮는다. 무엇이 있는지 보고, 쓸모없는 것을 분리 해놓다 보면 거실이 난장판이 된다. 내 머릿속은 난장판이 된 거실과 같았다. 대청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대청소는 물건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대청소 후에는 분리된 쓸모없는 것들을 내다버릴 수 있다. 그리고 깨끗이 닦은 서랍 속에 쓸모 있는 것들만 보관한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 쓸모없는 것들을 내다버릴 수가 없었다.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 그 쓰레기들을 보고, 보고, 또 다시 보다가, 소파 밑에 방치한다. 그냥 그렇게 쌓여간다. 쓸모없는 기억들과 경험들이 마구 쌓여서는 뒤죽박죽이 된다. 청소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몸만 고될 뿐이다. 기억은 청소와 다르다. 기억은 청소될 수 없다. 나쁜 것일수록 더 오래 자리하고, 버리고 싶은 것일수록 깊이 보관한다. 애석하게도 좋았던 것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다 버려지지만.

 나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원하지 않는 생각들을 멈추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바뀔수록 나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느낀다. 기특하기도 하다.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한 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나름의 청소 요령을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의미 없는 대청소를 거듭하다 보니, 분리배출할 수 없는 기억들을 따로 모아 두었다. 소파 밑에 쌓여버린 먼지처럼 방치되어 있다가, 머리카락과 함께 뭉쳐져 툭 튀어 나와 내 기분을 건드리던 그 기억들. 방치시키지 않고 한 군데다 잘 넣어두었다. 지금도 다시 열려고 하면 찝찝하고 기분 나쁘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언제든 툭-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니 갑작스런 우울감이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그 좋지 않던 일들이 시간이 흘렀다고 좋은 일로 변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2012년의 내가 저지른 일들을 2017년의 내가 처리한 것이다. 그때의 나는 감당할 수 없던 일이, 5년 후의 나에게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힘든 일도 몇 년 후의 내가 처리할 터. 현재의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는 지금 내가 직면한 문제를 감당할 만큼의 연륜도 요령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겨운 일들을 그냥 내버려 두려고 한다. 굳이 끄집어내서 후회하고, 반성하고 하는 따위의 감정낭비는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지금 내가 할 유일한 일은 ‘2020년의 나쁜 일’이라고 라벨을 붙여두고 쓸모없는 기억들이 담긴 상자에 담아두는 것, 그것뿐이다. 그럼 훗날의 훌쩍 자란 내가 멋지게 처리할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때의 나는 또 한 번, 지금의 나를 기특해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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