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 연대기 #1
스무 살 2월 끝자락, 얼마 되지 않는 짐을 가지고 상경했다. 서울 소재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함이었다. 학교 뒤편에 위치한 작고 저렴한, 보증금 200에 월세 40, 정말 저렴한 방 한 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스무 살이던 나는 집에 대한 것, 자취에 대한 것에 말 그대로 무지했다. 방이야 내 몸 하나 뉘이면 되는 곳이라 여겼다. 어려서부터 워낙에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었기에 혼자 사는 것에 대한 특별한 느낌조차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방은 5평 남짓의 공간이었다. 침대, 옷장, 작은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옆에 바로 싱크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욕실이 딸려있는 작은 방이었다.
그때의 나는 어떠한 기대도 없이, 혼자 산다는 기대에 심취해 있었다. 또한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을 고려했기에, ‘저렴하고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는 기준에 부합하는 방을 골랐다. 그리고 불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물론 1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집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버렸지만.
지금은 그 집을 떠올리면 좋지 않은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학교와 가깝다는 장점조차도 단점으로 변질되었다. 학교와 분명 가깝기는 했지만, 지하철역과 가깝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온통 언덕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언덕을 거치고 난 후 4층이었던 자취방을 올라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밖에도 정말 나빴던 기억 중 하나는 중앙난방식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관리비와 세금이 월세에 포함되어 있는 만큼, 가스 이용이 자유롭지 않았다. 추위를 아주 많이 타는 나로서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샤워를 할 때면 온수가 늦게 나오는 데다가, 보일러 조절도 자유롭지 않아서 정말 지옥을 맞보곤 했다. 너무 추워 화장실에 주저앉아 울기도 몇 번 울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이 존중되지 않으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씻을 때 물 온도 하나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 거울에 비친 나의 알몸을 보며 생각하자니 한없이 초라했다.
언제 적의 중앙난방이던가. 옛날식 아파트도 모두 시스템을 바꾸고 개별난방을 택하는 시점에서 ‘관리 세금 절감’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하에 세입자에게 엄청난 불편함을 제공하는 빌라였던 것이다.
또 하나는 마스터키가 있다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해당 빌라의 1층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들은 각 집의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한 번씩 내가 없을 때 다녀갔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기함할 만한 문제인데, 당시 어렸던 나는 혼자서만 화를 내다 그치는 정도였다. 하루는 건물 방역 문제로 모든 방에 외부인 출입이 불가피했던 날이었다. 외부인을 맞이할 준비를 마쳐놓고 사람을 기다렸다. 무사히 외부인이 방문했고, 방역처리도 금방 끝이 났다. 끝이 났으니, 숨겨놓았던 속옷들을 건조대에 다시 널어놓고, 잠옷을 침대에 던져두고 개인 스케줄을 행하러 외출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미묘하게 달라져 있던 내 방을 잊지 못한다. 건조대의 방향, 창문이 열려있던 정도와 같은 세세한 것들로 인해 알 수 있었다. 내 공간을 침범당했을 때의 그 낯선 공기, 내 공간에 물들어진 타인의 손길, 모두 소름 끼치도록 섬짓했다. 그때 나는, 작아도 소중한 나의 공간이 오염되었다는 기분을 느꼈다. 집주인이 방역문제 때문에 한 번 더 방문을 한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없는 내 방에, 이방인이 들어섰다는 사실이 나를 소름 돋게 했다.
그 이후로 그 집과의 계약 만료 날을 카운트다운을 했다. 새로운 집을 알아보며 1년 사이에 집을 보는 기준이 늘어난 것을 체감했다. 저렴하고 깨끗한 방, 딱 두 가지였던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스무 살의 나. 스물한 살이 되자 저렴하고 학교와 가깝지만 언덕길이 아니고, 개별난방이 되며(너무나도 당연한 조건이었지만), 열쇠가 아닌 번호 키가 달린 곳이어야 했다. 고작 1년 만에 두 가지에서 다섯 가지로 늘어난 조건을 맞추기엔 허용된 보증금의 범위가 너무 작았기에, 선택한 차선책은 셰어하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