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
세계(世界)는그러한 무수(無數)한 간단(間斷)
오오 사랑이 추방(追放)을 당하는 시간(時間)이 바로 이때이다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산(山)이 있거든 불러보라
나의 머리는 관악기(管樂器)처럼
우주(宇宙)의 안개를 빨아올리다 만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1960) 전문
시간과 공간을 개념적으로 전제하는 인간의 삶은 그 개념들을 무수한 사건으로 채움으로써 가능해진다.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비어 있을 수 없다. 삶은 사건의 연속이다. 시공간 속에서 사건은 가치판단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단위를 차지한다. 예술과 생활 모두 시공간에서는 좋고 나쁜 것 없이 일정량을 채우는 사건일 뿐이다. 그런데 시공간이 사건들로 채워진다는 말을 거꾸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삶을 위해 시공간을 사건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인데, 이때의 사건은 가치판단의 대상이 된다. "시공간이 사건으로 채워진다."는 문장과 다르게 "인간이 시공간을 사건으로 채운다”는 문장에서 주어가 인간인 한, 그리고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가치 판단을 하는 한, 시공간을 채우는 사건에는 예술을 선택할 것이냐 생활을 선택할 것이냐와 같은 행위 주체의 기호가 개입된다.
행위 주체인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공간을 무수한 사건으로 채우며 살아간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이러한 행위로 인해 삶의 한 단위인 하루는 "피곤한 하루"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공간을 사건들로 채우는 피곤한 하루 외의 "나머지 시간"이란 행위 주체의 의식 속에서는 예술적 사건이나 생활의 사건 모두 이뤄지지 않는 단절된 시간이다. 삶의 시공간에 사건이 부재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삶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수한 간단"이 존재하는 세계란 사건의 단절, 즉 죽음으로 뒤덮인 세상이다. 예술이든 생활이든 그것은 삶을 지속하게 하는 기본 요소이다. 사건에 대한 기호가 있을 수는 있어도, 그러한 기호가 특정 사건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할 수는 있어도, 사건 없이는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만일 인간 존재의 삶에 어떠한 사건도 없다면 그러한 삶은 죽음과도 같은 삶, "사랑이 추방을 당하"고 말아 아무것도 감각하지 못하는 삶인 것이다.
현대의 삶을 채우는 사건은 자본에 의해 강요된 사건이 대부분이다. 죽기 싫으면 좋든 싫든 재화 획득을 위한 노동을 해야 한다. 강요되는 사건은 현대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역설적으로 죽음을 환기한다.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시공간을 무수한 사건으로 채울 때마다 "그래, 나 죽지 않았어."라고 되뇔 때마다 행위 주체는 어느 때보다 죽음을 가까이 느낀다. 주체가 사건을 발생시킨다는 것 자체가 주체로 하여금 죽음이라는 관념을 인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건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 채 삶의 시공간을 사건이 부재하도록 내버려 두는 때에 죽음은 보다 명확해진다. 자신의 삶을 증명할 단서들이 부재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 행위 주체는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은 존재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살기 위해 피해야 하는 것인 동시에 피곤한 하루의 바깥에서 휴식을 전해줄 '산'과 같은 죽음은 이중적이다. 이중성으로 인해 이 시의 행위 주체인 화자는 휴식처인 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이러한 화자의 정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산"을 대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눈을 가늘게 뜸으로써 현실에서 벗어난 휴식, 즉 죽음으로서의 산은 화자에게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게 되는데, 이러한 산의 반투명성이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갈등하는 화자의 이중적 면모를 나타낸다. 강요된 사건에서 벗어나 산을 바라보며 생활인이 아닌 자신의 예술가적 영감을 일깨우고 싶지만 강요받지 않는 상황이란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산은 마음 놓고 볼 수도 보지 않을 수도 없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출처 : 강민근 and 이경수. (2020). 김수영 시에 나타나는 이중적 유토피아. 한국근대문학연구, 21(1), 145-179.
"인간이 시공간을 사건으로 채운다”는 문장에서 주어가 인간인 한, 그리고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가치 판단을 하는 한, 시공간을 채우는 사건에는 예술을 선택할 것이냐 생활을 선택할 것이냐와 같은 행위 주체의 기호가 개입된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는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여 선택권을 가지는 것이다. 바둑에서 '꽃놀이패'는 이기면 큰 이익을 얻지만 져도 부담이 적은 패를 뜻한다. 이처럼 선택지가 전부 나에게 유리한 삶이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하고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
(출처 : 진정한 자유, https://brunch.co.kr/@gkalfm000/7)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의 없는(ou-), 장소(toppos)라는 두 단어를 결합하여 창안한 유토피아(Utopia)는, 모두가 바라지만 지금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뜻하며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청사진임과 동시에 현실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할 수 없다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출처 : 이경묵. (2022). 대안적 상상력의 원-형식: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의 구조 분석. 문화와융합, 44(4), 1203-1220.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의 없는(ou-), 장소(toppos)라는 두 단어를 결합하여 창안한 유토피아(Utopia)는, 모두가 바라지만 지금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뜻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는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여 선택지가 전부 나에게 유리한 삶이다. 이는 유토피아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첫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 철학 1화 니체, "위버멘쉬" 편에서 위버멘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진정한 자유를 가진 자'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네번째 격자틀 인식 모형, 영화 22화 주토피아 편에서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일체의 모든 것을 지혜로 자르는 문무겸전의 존재(금강역사)가 되어 불교의 유토피아인 정토(淨土)에서 살 것이라고 적었다.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일체의 모든 것을 지혜로 자르는 문무겸전의 존재(금강역사)가 되어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자 한다.